[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추억 나무

M스토리 입력 2025.04.15 16:33 조회수 646 0 프린트
 
 
 










며칠간 기온이 영하와 영상을 오르내리더니 완전 봄 날씨다. 가끔 미세먼지와 찬바람이 불어서 그렇지 바깥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일요일이었다.

하여 아내와 함께 등산을 하자고 길을 나섰다. 가까운 둘레길은 땅이 녹아 질척거릴 것 같아 사시사철 낙엽이 깔려있는 <산할아버지>쪽 등산로를 택했다.

산타할아버지처럼 흰 수염이 멋진 산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여생을 묵묵히 산길 주위에다 벚나무와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 각종 관상수를 심어 울창하게 가꾸어놓은 의인이다. 연인이나 등산객이 걷기 좋게 산길을 잘 조성해준 실로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어느 뜻 깊은 독지가가 할아버지의 두상을 조각하여 산 길목에 세우고 뒷면 석판에다 산할아버지를 기리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산할아버지*

여기에 길과 다리 3개와 층계를 3개씩이나 손수 만드시고 수많은 벚꽃나무와 은행나무, 단풍나무를 비롯한 관상수를 손수 심고 가꾸시어 정원 같은 등산로를 만드시다 고인이 되셨습니다. 자손만대 자연사랑으로 이곳에 절대 산불이 나서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에 고인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이 상을 세웁니다.

2006년 4월 5일 식목일 골짜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 골짜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산할아버지의 정성 때문일까! 지난해 연말 눈이 펑펑 쏟아져 골짜기 마다 설해목이 즐비했건만 산할아버지가 조성한 나무들은 벚나무 한 그루만이 곁가지가 부러졌을 뿐 거의 설해를 입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 그런가, 오늘따라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문득 저지난해 친구L이 Y시 외곽에 새집을 지었다하여 그 집 마당에다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식수했던 생각이 났다.

등산을 마치고 그 친구를 추억하며 하산하는데 이번엔 아내가 좀 특별한 나무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무슨 나문데?”하고 아내를 바라보자 재개발지역 안에 있는 단풍나무를 보여주겠단다. 등산길에 알게 된 어느 노인네 집 단풍나무인데 무슨 의미인지 대뜸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며 앞장서 걷는다.

아내는 내가 Y시에서 근무하는 평일엔 혼자 등산을 한다. 등산을 하다보면 산길에서 오다가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재개발지역에 살다 이주한 노인 한 분이 지난주 하산 길에 자신이 가꾸던 단풍나무를 보여주고 싶다 하여 따라갔단다. 처음에 아내는 얼마나 잘 가꾼 나무이기에 그러나 싶어 자못 크게 기대를 했다 한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담처럼 막상 실물을 눈으로 확인해보니 너무나 볼품없는 나무여서 한숨이 나왔다 한다. 하지만 그 노인은 그 단풍나무를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내내 바라보았고 돌아서면서도 차마 눈을 떼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하여 아내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나무인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듯 빠르게 앞장서 걸었다.

그 골목길은 여름철 등산길에 가끔 지나다니던 길이라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낯설고 불쾌했다. 이주민들이 버리고 간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다 출입금지 안내문과 붉은색 테이프가 둘러쳐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얼마나 걸었을까. 퇴락한 붉은 벽돌집 앞에서 아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 나무-” 하고 아내가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나는 선뜻 알아보지 못했다. 나무가 녹슨 철대문 뒤에 몸을 숨기듯 바짝 붙어 있었고 내가 서있는 방향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청단풍나무였다. 그런데 그 청단풍나무가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겨울이 다 지난 중춘(仲春)인데도 아직 나뭇잎을 떨어버리지 못한 채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하얀 손수건도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SOS 구조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측은했다. 그리고 가슴 밑이 짠했다. 어쩌면 주인이 버리고 떠난 집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노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노인이 그랬다 한다. 이사를 갈 때 파서 옮겨가고 싶었다고… 하지만 전세 아파트로 이주를 하게 되어 그럴 수 없었다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한다.

혹여 우리 눈에는 초라하게 보이는 단풍나무지만 그 노인에겐 자못 소중한 나무였던가 보다! 어쩌면 어떤 애틋한 사연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생일이나 어떤 특별한 기념일에 그 나무를 누군가 가져왔고 노인이 그 나무를 심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가꿔왔는데, 재개발로 인해 그 사람을 버리고 떠나는 것 같아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아내에게 그 노인을 또 만나게 되면 나무에 얽힌 사연이 있는지 물어봐 달라했다. 그리고 그 골목 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느 폐가 처마 밑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빈 밥그릇을 앞에 놓고 엎드려 졸고 있었다. 그 곁에 깨진 화분과 시든 꽃나무가 비스듬히 쓰러져 나를 바라본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떠나온 우리 고향집 꽃나무처럼…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 노인네는 멀리 이사를 가서, 다시 오긴 어렵다고 했어요.”

아내의 말소리는 내게 봄이 가기 전에 ‘고향집에 다녀오라’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문득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펄럭이던 하얀 손수건도 생각났다.

누군가의 이름이 곱게 새셔져 있을 것 같은 하얀 손수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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