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은 세자 시절의 불행했던 경험 때문일까? 온갖 미신을 크게 신봉하였다. 늘 점쟁이들, 풍수가들을 가까이했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풍수가 이의신의 말을 듣고 수도를 한양에서 교하로 천도하는 것을 추진하는가 하면, 계축옥사 때 저주 행위로 인해 절도에 유배된 점쟁이가 용하다 하여 사람을 보내 점을 치기도 했다. 복동이란 점쟁이가 중전의 병세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옥사 중 풀어주어 궐 안에서 명산대천을 다니며 화려한 기도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때맞춰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어 왕은 많은 상을 내렸다.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물었으며, 말년에는 칙서를 받는 일까지도 길일을 택해서 하려 하였다.
음양술은 왕을 끝없는 궁궐 공사로 이끌었다. 전쟁으로 궁궐들이 다 타버렸고 환도한 선조는 옛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궁으로 삼았다. 아쉬운 대로 수리를 해서 쓰면서 창덕궁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죽고 난 이후 광해군 2년에서야 비로소 완공하였다. 재정이 부족해 공사에 힘을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덕궁 공사가 끝나자마자 왕은 또 창경궁도 중수할 것을 명하였다. 삼사의 적극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심병을 핑계 삼아 창경궁을 재건하였다. 그런데 광해군 9년에 왕은 다시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인 인경궁을 조성할 것을 명하였다. 그것도 청기와, 황기와로 지붕을 덮을 것을 명하고 이어 풍수가인 김일룡의 말에 따라 정원군의 집 일대에 경덕궁인 새 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신하들은 한 궁을 완성하고 다음 궁을 지을 것을 주청하였으나 왕은 설계도면의 작성과 검토에서부터 재정마련, 자재확보 등 세세한 부분까지 손수 지휘하였다. 때마침 파병까지 겹치게 되면서 나라는 재정 고갈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여 전쟁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벼슬을 팔아 재정을 마련하려는 정책이 다시 실시되었다. 장사로 돈을 번 부녀자들은 부인의 직첩을 받고 호화로운 가마를 타고 다니는가 하면, 궁궐 구역 안 집터를 바치거나 목재 또는 석재를 바쳐 벼슬하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왕은 허균의 옥사를 겪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이첨의 위세 때문에 허균에게 한번 물어보지도 못한 채 죽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심문하지 않고 형을 시행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유희분이 문제 삼았으나 이이첨을 질책할 순 없었다. 이미 이이첨의 세가 너무 커져 있었던 것이다. 북방의 일도 이이첨이 주도하는 비변사에 의해 저지당하기 일쑤였다. 광해군의 권력은 초기에 강했으나 그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은 연이은 옥사였다. 직접 국문하며 수사를 지휘하고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옥사를 키웠다. 신하들은 행여나 불똥이 튈세라 몸을 낮추었고 존호를 올려 왕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그렇다. 왕의 권위를 드높여준 듯이 보였던 옥사가 문제였다. 세자 시절의 불안과 울분에 대한 반작용으로 왕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해가 될 것 같으면 뿌리를 뽑아내려 들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준 이가 바로 이이첨이었다. 왕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그에 반비례하여 타 정파의 사대부들은 소외되어갔다. 폐모론이 전면에 제기되면서부터는 이이첨 천하가 구축된 것이다. 그렇게 인사에 관한 한 왕은 부왕 선조에 비하여 하수였다. 인재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선조는 숱한 인재를 발탁 등용하면서도 서로를 견제시키고 적절히 물갈이하는 방식으로 특정인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정원군의 집을 헐고 경덕궁을 지었지만, 그 자리에 서려 있다는 왕기는 지우지 못한 걸일까. 인빈의 아들 정원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능양군, 능원군, 능창군 이었다. 신경희의 옥사 때 거론된 관계로 셋째 능창군은 교동에 안치되어 자살하자,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상심 끝에 죽자 능양군은 반역을 결심했다. 먼저 무인인 이서, 신경진 등과 의기투합하고 문인 김류,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 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해 온 3여년, 반역의 성패는 궐 안의 내응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알고 훈련 대장 이흥립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그만 소문이 나고 만 것이다. 반정을 도모하던 이들은 이제 모두 역적의 이름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로 몰렸다. 이귀는 정면 돌파 전략을 썼고, 김자점은 뇌물을 써서 로비를 했다. 폭넓은 정보로 왕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던 김개시에게 뇌물을 쓴 것이다. 광해군은 그녀의 총명함에 매료되어 정사를 그녀에게 자주 물어보곤 했다. 이귀와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다는 밀고는 누가 지어낸 거짓이라고 왕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고비를 넘긴 능양군 등은 마침내 광해군 15년 3월에 거사를 결의한다. 그런데 이 계획도 거사 직전에 누설되고 만다. 하지만 이날 왕은 후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늦게야 보고를 받고는 시큰둥하게 반응하였다. 유희분, 박승종이 번갈아 속히 조사할 것을 청하자 그제야 금부 당상들과 포도대장 등을 입직케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시각 홍제원에는 반정의 주역들이 모여들었는데 분위기는 썰렁했다. 좌장이자 책사 격인 이귀가 나서서 진정시켰다. 이윽고 기다리던 이서의 군대가 당도했고 집에서 꾸물거리던 대장 김류도 나왔다. 능양군과 김류가 이끄는 반란군은 3경에 창의문의 빗장을 부수고 돌입했다. 돈화문에 당도하니 이홍립이 문을 열고 맞이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난을 접하고 광해군이 처음 꺼낸 한마디는 이 시기 그의 정세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이첨의 짓이냐?” 사다리를 이용해 후원 쪽 담을 넘고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이내 잡힌 몸이 되고 만다. 폐모로 논해지던 대비인지라 바로 광해군의 폐위 교서를 내리니, 하여 능양군이 즉위하니 바로 인조다.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이 된 광해군은 세상사를 그저 운명론에 맡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