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천량의 패전으로 거칠 것이 없어진 12만의 일본군은 전라도를 총공격해서 삽시간에 휩쓸어버렸다. 남원성도 진주성도 무너져 버렸다. 선조는 그제서야 이순신이 주장했던 한산도를 고수해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출병을 독촉해서 이런 일이 초래됐으니 이는 사람이 한일이 아니고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백의종군을 가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졌다.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난중일기’를 가득 채울 만큼 효자였던 이순신, 그러나 그는 나라를 위한 길을 가야만 했다. 권율 휘하에서 잠시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는데, 칠천량 패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애써 키운 분신과도 같은 수군이 사라진 것이다. 며칠 뒤 3군 수군통제사로 복직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이순신은 곧바로 남해안으로 떠났다. 지근거리에서 일본군이 휩쓸고 다니는데 이순신은 보름 동안 연안 고을들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장수와 병사들을 다시 불러 모았고, 군량과 무기도 마련하였다. 다행인 것은 판옥선 열두 척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에게 거듭 퇴각 요청을 하였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칠천량에서 이탈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삼았지만 무너진 수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겨 이순신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권고했다. 이에 대한 이순신의 답변은 “임진년으로부터 오륙 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나이다.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해볼 만하옵니다.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터인데 신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싸움을 자기 주도로 이끌어가는 이순신은 벽파진에 정박해 적을 기다렸다. 적은 함대로 강대한 적과 싸우기 위해 고심 끝에 택한 장소였다. 과거 한산도에 위풍당당하게 진영을 구축했던 것에 비하면 옹색하게 보였을 것이다. 일본 수군은 12척의 이순신을 잡기 위해 300척을 동원했다. 적의 움직임을 접한 이순신은 우수영으로 옮겨 집결한 채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병사에게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 것이나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켜도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여러 장수는 나의 명령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도록 해라. 돛을 올려라. 울둘목에서 적을 기다린다.” 병선은 한 척이 더해져 모두 13척이 되었다. 백성의 어선 100여 척도 전선으로 꾸며 후미에 배치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적의 함대, 그러나 300척이라 해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배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곳,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고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적의 위세 앞에 겁을 먹은 휘하 장수들이 뒤로 빠져 관망을 하는 사이 이순신의 병선은 개전하고 상당 시간을 홀로 적진 속에서 분투해야 했다. 이순은 초요기를 올려 장수들을 부르고 호통을 쳤다. “군법에 죽고 싶은가?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다시 결의를 다진 조선군의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좁은 해협에 밀집된 적들은 좋은 표적이 되었다. 때맞춰 조류의 흐름도 바뀌었다. 불타는 적선은 불쏘시개가 되어 다른 적선들을 불사르는 양상이 되었고 견디다 못한 적들은 마침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수군들도 멀리서 지켜보던 백성들도 믿을 수 없는 승리에 환호성을 질렀다. 이 뒤로 일본 수군은 다시는 조선 수군과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다시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통행세를 거두어 군량을 확보하는 한편, 전함을 만들고 군사를 모아 훈련 시키는 등 빠르게 수군을 재건해냈다.
정유년 2차 침략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표는 조선 땅의 절반인 4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은 무자비한 살육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만나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살육의 징표로 코를 베어 상자에 포장해 나고야로 보냈다. 가장 피해가 큰 지역은 호남 일대였다. 일본군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한강 이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코 베기에 열중하며 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이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다시 명나라에서도 대군을 파병했다. 명나라는 사실 파병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체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군의 패전이나 명군의 참전 소식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일본 진영에 전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략을 명한 뒤 자리에 누웠다. 이에 대한 소문은 병세가 나빠지면서 점차 증폭되어 급기야 죽었다는 정보가 조선 측에도 전해졌다. 마침내 선조 31년 전쟁과 학살의 지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소식을 접한 일본군들이 철수 준비를 서두르는데 조명 연합군이 급히 뒤쫓아 내려왔다. 명나라 군대도 이번만큼은 제대로 싸워보리란 분위기, 그런데 울산성에서 가토가 3만에 달하는 동로군인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사천성에서는 3만 7천명의 중로군이 패해 물러났으며, 3만 6천명의 서로군도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다가 중로군의 참패 소식을 듣고 후퇴했다. 이에 명군은 다시 일본군의 철수를 용인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며, 일본군은 마침내 철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는 곤란에 빠졌다. 뇌물을 보내 명나라 육군으로부터는 안전 철수를 보장받았는데, 조선 수군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 바다에는 수군 제독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함께 있었다. 이순신은 진린을 환대하고 싸움에서 거둔 수급까지 양보하며 진린의 마음을 얻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도 뇌물을 보내 안전 철수를 보장 받았지만 이순신은 단호했다. 고니시는 할 수 없이 사천성 부대에 구원을 청했고 구원병의 움직임이 이순신에게 포착되었다.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분전 중에 눈먼 적탄 하나가 이순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싸움은 조선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승리의 환호성은 이내 통곡으로 바뀌었고, 오래지 않아 남도 전역을 뒤덮었다.
“필사즉생(必死卽生), 이순신 본인의 죽음으로 조선을 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