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 17일까지 약 9개월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벌인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대변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특히 조선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청일 전쟁 이전, 조선은 수세기 동안 청나라의 책봉-조공 관계 속에서 형식적으로는 자주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영향력은 조선의 내정에도 깊숙이 미쳤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명분이 된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한 청군 파병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국제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는 "조선은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확인한다"고 명시하며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했다. 이는 겉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 일본의 새로운 지배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은 더이상 청나라의 '속방'이 아니었으나, 곧이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의 자율성을 확보하기보다는, 한 열강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 다른 열강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는 불행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청일 전쟁은 조선 내부의 정치 개혁을 가속화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 직전,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 운동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개혁의 움직임을 보였으나, 일본은 이를 빌미로 내정 간섭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개혁을 강요했다.
일본의 압력 속에 단행된 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은 봉건적인 신분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제를 도입하며, 재정, 사법 등 국가 시스템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노비 제도 폐지, 과거 제도 폐지, 조혼 금지, 과부 재가 허용 등 사회 제도의 근대화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이러한 개혁이 일본의 강압적인 개입 아래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했다. 특히 일본은 개혁을 명분으로 친일 세력을 옹립하고 조선의 정치를 좌우하려 했으며, 이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 세력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청일 전쟁은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더욱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 중 일본은 군수 물자를 조달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자원을 약탈했으며, 전쟁 승리 후에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파급 효과와 함께 경제적 침투를 본격화했다. 일본은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박탈하고, 일본 상품의 조선 시장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또한, 일본 자본은 철도, 광산, 농업 분야에 활발히 투자하며 조선의 경제 기반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곡 수탈은 조선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조선 사회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농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개항 이후 지속되어온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청일 전쟁을 계기로 더욱 노골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청일 전쟁은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청나라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일본의 침략 의도가 명확해지면서, 조선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자주 의식은 의병 운동과 애국계몽 운동으로 이어졌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일본의 세력이 잠시 약화되자,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 세력에 저항했다. 또한, 독립협회와 같은 근대적인 민족 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근대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주 독립을 향한 노력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열강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조선은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했고, 일본의 군사적 우위와 체계적인 침략 전략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일 전쟁의 결과는 조선이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음을 드러냈고, 이는 궁극적으로 러일 전쟁 이후 일본에 의한 강점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