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기묘사화(己卯士禍)

M스토리 입력 2024.06.28 15:58 조회수 1,502 0 프린트
 

1506년 박원종은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얼떨결에 왕좌에 오른 중종은 반정으로 연산이 쫓겨나는 것을 경험한지라 모든 임금들이 가졌던 최우선 목표였던 왕좌의 유지에 최선을 다하였다.

연산처럼 강력한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중종은 신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최대한 성실하고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또한 자신을 지켜줄 보디가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다른 신하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자와 동맹의 관계를 원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반정의 일등 공신이자 주역인 박원종이었다. 반정의 주도자로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역모 사건들도 별 탈 없이 제압하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보호자 및 동맹 격인 박원종이 중종 5년에 갑자기 사망해 버린 것이다. 이어 유순정, 성희안 조차도 유명을 달리했다. 중종은 또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등장한 인물이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평안도 희천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을 기회로, 마침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학군자(小學君子)’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이를 보면 조광조는 김종직 이후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한 것이다. 그는 벼슬이 높아갈수록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음먹고 있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도학정치란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정치이며, 그 원류는 유학에서 이상 시대로 알려진 요순시대의 정치 그것이었다.

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사림세력은 민본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다. 임금의 철저한 수신을 비롯해 조정 내 언로의 확충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대 시행되던 과거제가 주로 기예만 시험을 본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덕성에 바탕한 관인 선발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정착을 위해 성리학적 생활 규범을 규정하고 있는 [소학]의 보급이나 향약의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당대 사림세력은 대부분 젊은이로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너무도 그 수단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또 자기네들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훈척 세력인 남곤이나 심정등을 소인이라 지목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알력과 반목이 일어났다. 1519년 조광조 세력은 마침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의 제거였다. 이른바 위훈 삭제 운동으로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신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을 겨누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공신세력들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라 불리는 사건이다.

기묘사화와 관련해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술수가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지동(地動), 즉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를 국왕이 근심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조광조와 반대 측에 있던 남곤과 심정 등은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그 징조로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중종에게 간언하였다. 여기서 권세 있는 신하가 다름 아닌 조광조였다. 그리고 남곤 등은 그 뒤 연거푸 말을 지어 퍼뜨리기를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또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자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왕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走肖’는 즉‘趙(조)’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 및 사림세력을 발탁했던 중종 역시 마음을 돌리게 되고, 이를 간파한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밤중에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왕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이하 여러 사람이 일단 하옥되었다가,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곤∙심정 등의 주청으로 이들 조광조 이하 70여 명을 모두 사약으로 죽였다. 

시대를 앞선다는 것은 결국 당대 사회의 대세와 충돌하게 되고, 끝내는 당사자의 희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아는 율곡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광조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충현(忠賢)도 많았으나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자도 섞이어서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으니,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神武門)이 밤중에 열려 어진 사람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몹시 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와 같이 평하고 있다.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것이 조광조의 학문의 숙성되지 않았다는 것, 너무 급진적이었고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왕조의 유지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은 중종 39년은 모든 것이 제자리 걸음이었다. 조광조 및 김안로의 제거는 모두 중종의 기획과 실행이었다. 왕에게는 그저 나라와 백성이 자신의 소유물이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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