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새 초여름이다. 낮에는 덥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하여 운동하기 좋은 날씨다. 하여 하루를 운동으로 시작하고 운동으로 마무리한다.
윗몸 일으키기, 항문 조이기 그리고 허리 돌리기와 걷기…
아침방송을 들으며 운동을 한다. 그리고 또 밤 방송을 들으며 잠을 잔다. 출장지에서 혼자 지내다보니 심심하고 적적하여 그렇게 된 것 같다. 간혹 새벽 3시나 4시경에 깨더라도 24시간 강원민방을 들으며 잠을 청한다. 잠이 잘 오지 않아도 마치 누군가 곁에 있는 것 같아 좋다. 라디오방송은 마치 다정한 친구 같고 끈끈한 동지 같다. 어려운 사정을 다 들어주는 이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전 아침엔 한 중년 여인의 사소한 편지를 방송진행자가 읽어주었다. 듣다보니 어쩌면 내 일상과 흡사하여 볼륨을 높였다.
내용인즉, 24년 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늘 자기가 연락을 하여서 만났지, 단 한 번도 그 친구가 연락을 해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 문득 자기가 너무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연을 다 읽고 나서 방송 진행자가 위로하듯 한마디 들려준다.
‘자기는 그 분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겸손하게 상대가 요청하는 것을 존중하고 들어주는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인 것 같다. 그러니 그 오랜 기간 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며칠 후 상경하여 아내에게 그 방송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아내도 그 여자의 심정을 십분 공감한다며 한 마디 한다.
“나도 내가 전화를 하는 편이에요. 그 사람 안부가 궁금하면… 내가 사람을 끄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관계를 유지하려는 거예요.”한다.
‘관계를 유지해서 뭐해. 무슨 소득이 있다고.’ 하고 말하려다 속물 같은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
아내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이 먼저 전화를 하지 않는 건 아마 전화할만한 일이 없거나 가치가 없어서 그럴 거예요.”
‘가치가 없다’는 말은 듣기에 좀 거북했다.
‘살아있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아내가 다시 말을 잇는다.
“나나 당신이나 우리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정감이 별로 없어서, 서로 먼저 연락하지 않는 건…” 한다. 마치 분위기를 정감 있게 이끌어야할 가장인 나를 질타하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우린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속담처럼 무감각하게 지내는 게 아니겠느냐’ 하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물론 가족이라고 해서 무덤덤하게 지낼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에 작고한 아내의 이모부님이 그랬다. 계절마다 풍경사진과 좋은 글귀를 어디선가 열심히 퍼다가 문자로 보내주곤 하였던 것이다. 하여 ‘고맙습니다’하고 답장을 보내드리자 그 이모부님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
“친지님께 한 말씀 올립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글과 사진에 대해 절대 답장하느라고 수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 나 같이 답장을 하는 친지들이 많았던가보다. 하여 ‘편하게 서로 부담 없이 즐겁게 살자’는 방향에서 그렇게 미리 준비한 문자를 보낸 것이리라.
그렇다. 이제는 그 이모부처럼 안부나 정겨운 내용을 쉽고 간편하게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계절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살갑고 애틋하게’ 각자 사연을 주고받던 낭만적인 시대는 이제 멀리 지나간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한때 손편지가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편지를 정성스럽게 보내려고 편지지를 고르고 밤을 새워가며 아름다운 시 구절도 찾아 베끼고... 아침에 일어나 다시 읽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찢어버리고, 또 다시 쓰고…
친구끼리는 물론 친지나 가족끼리도 얼마나 많은 편지와 연하장을 계절마다 주고받았던가!
아내와 대화를 마치고 나자 문득 당나라 시대에 살았던 ‘방거사’라는 사람의 명상이 생각났다.
“일상사가 특별한 것이 없어서, 오직 내 스스로 짝하여 어울리도다.”
방송으로 사연을 보낸 그 분은 어쩌면 사소한 생활 가운데 소중한 깨달음의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24년이 지났지만 처음처럼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다가 문득 그 ‘일방적’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말이다. 그 순간이 자기 자신과 짝하는 각성(覺性)의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그런 친구가 한 사람 있다.
20여 년 전, 명상센터에서 마음공부를 할 때 만난 도반인데 통 소식이 없다가 얼마 전 봄날 저녁에 연락을 하여 만난 친구다. 그가 시골 고향에서 작두콩과 찰옥수수 종자를 얻어왔다며 나에게도 몇 알 나눠주었다. 하여 이튿날 텃밭에다 고랑을 일구고 심었더니 두어 주일이 지나자 싹이 파랗게 돋고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20여년의 시간처럼 머지않아 다가올 여름과 가을이 기대된다. 그 도반이 건네준 인정의 씨앗이 싹을 내고 푸르게 성장을 하여 마침내 향기롭게 열매가 영글면 그 소식을 핸드폰으로 찍어 SNS로 보내주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