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도 기가막힌 기회가 찾아왔다. 1456년 세조 2년 6월 명나라 사신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을 위해 세조가 베푸는 연회 자리에 세조 제거의 뜻을 같이하는 성승, 유응부가 별운검(무장을 하고 임금의 좌우에서 호위하는 2품 이상의 무반)으로 결정된 것이다.
성승은 왕과 세자, 한명회, 신숙주 등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테니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역할을 나눠 왕과 세자는 유응부가 처리하고 박팽년의 족친인 김문기는 바깥 경호를 맡기로 했다.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했는데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한명회가 세조에게 자리가 좁으니 별운검을 빼자고 주청하니 받아들여졌다.
성승과 유응부, 성삼문과 박팽년의 대화는
“이렇게 계획이 틀어지다니, 그래도 그냥 진행합시다!”
“아니오. 오늘은 이미 틀린 것 같구려.” “아닙니다. 세자도 마침 들어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별운검마저 들이지 않는다하니 이는 하늘의 뜻인듯 싶습니다.”
“만일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켜 오면 성패를 알 수 없습니다.”
유응부는 “어허 이보게들 이런일은 번개같이 해치우는게 상책이라네. 수양과 한명회 등을 다 죽이고 상왕을 복위시켜 경복궁으로 쳐들어가면 세자가 어디로 도망가겠나? 미루었다간 누설될 수도 있어.”
“다시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잠깐의 옥신각신 끝에 결국 주모자 격인 성삼문, 박팽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계획이 틀어지자 바로 이탈자가 나왔다. 실패한 이튿날,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간 것이다. 사위로부터 자초지종을 듣자 곧바로 사위를 앞세워 대궐에 입궐해 세조에게 고변했다. 사건이 불거지고 관련자들이 붙들려왔다. 대궐은 금세 거대한 고문장으로 변했다.
국문장에서 성삼문은 세조에게 “나리가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지 않았소? 우리는 상왕전하의 신하지 나리의 신하가 아니오.” 이에 세조는 “네놈들이 나를 나리라 부르는데 그럼 내가 준 녹은 왜 받아 먹었느냐?”라고 하자 “우리 집 창고에 가보시오 나리가 준 녹은 손도 대지 않았으니” 조사해보니 과연 그러했다.
또한 박팽년에게 “네 이놈 박팽년 너는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 내게 장계를 올리며 신이라 칭하지 않았더냐?” 그러자 박팽년은 “그런적 없소이다.” 조사해보니 ‘신(臣)’자가 들어갈 자리의 글씨는 모두 ‘거(巨)’자가 대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신숙주는 성상문과 절친한 친구였으나 세조의 측근이 된 신숙주는 국문을 담당하는 입장이었다. 시종 당당한 성삼문을 부끄럽게 한 이는 동료인 유응부였다. “자고로 서생들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들 하더니 과연 그렇군. 그대들이 말려서 이 꼴을 당하게 되었다. 너희는 책을 읽었으되 꾀가 없으니 짐승과 마찬가지야.”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했고, 박팽년은 고문으로 옥사했으며, 성삼문 등 수십여 명은 능지처사 된 후 3일간 효수되었다. 사육신이 충신의 대명사로 이름을 얻으면서 거기서 빠진 성승, 김문기, 권자신 등은 상대적으로 세인의 관심에서 밀려나기도 했지만, 현실의 패배자인 그들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부활했다. 한편 고발자인 정창손, 김질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 박팽년 -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 성삼문 -
충(忠)과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단종을 힘으로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무리가 있다는 것을 한명회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사건을 명분삼아 불순한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려는 의지. 사육신 또한 어린왕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수단은 아니었을까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