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종의 피의 숙청
명나라 홍무제 또한 피의 숙청을 말리는 황태손 주윤문을 불러 가시나무를 집어보라 시키고서는 집지 못하자 “가시가 있으면 손을 찌르게 마련이다. 할애비가 살아 있을 때 그 가시들을 모두 없애주려 함이니라”라며 만명이 넘는 신하들을 숙청한다. 같은 마음이었으랴. 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왕권에 도전하거나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씩 축출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인물은 이거이였다. 태조 때의 무장이자 태종과 혼인 관계로 맺어져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됐다. 그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다.
태종의 처가 민씨가의 몰락
태종의 다음 타겟은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서, 세자 양녕의 어린시절을 돌보았고, 태종을 도와 그가 왕위에 가장 오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두 번의 선위 파동과 함께 결국 원경왕후 집안의 4형제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들이 슬퍼할 때 기뻐했고 남들이 기뻐할 때 실망한 기색을 했다는 죄목은 아무래도 좀 우습게 여겨졌는지 결국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 주 죄목이 되어 왕비의 변호조차 철저히 막아버렸다. 태종은 두 처남이 반역의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민씨 가문에 왕권을 위협할 만한 힘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왕권에 도전하거나 도전할만한 모든 세력을 없애자는 것이 태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의 장인 심씨가의 몰락

자신의 처가인 민씨가에 이어 아들이 처가인 심씨가마저 박살 내버린 태종!
이로써 태종은 아들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으로 마음껏 치세할 수 있도록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