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주인 없는 땅

M스토리 입력 2023.05.01 20:56 조회수 1,821 0 프린트
 
 











주인 없는 땅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비어있는 땅을 공지라 한다. 공지는 휴한지, 유휴지, 공한지 등으로 구분하는데 휴한지는 휴경지라 하여 지력회복을 위해 적당한 기간 동안 의도적으로 쉬게 하는 농지이다. 반면 공한지를 포함한 유휴지는 대개 투기를 목적으로 놀리는 땅이라 투기를 억제하고 국토의 효율적 운용을 촉진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공한지세’를 물리고 있다.

봄이 되어 내가 씨를 뿌리려고 괭이질하는 텃밭은 땅 주인이 둘이다. 반쪽은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자투리땅이고 반은 양봉장을 하는 최선생네 자투리땅이다. 다소 비탈진 지형이라 서로 편하게 담을 쌓다보니 여유가 생긴 공간으로 세 평 남짓 될까, 그런 땅에다 내가 두 집의 허락을 받아 괭이로 고랑을 파고 상추와 고추, 방울토마토, 들깨와 호박을 심었다.

하여 등기상으로는 두 집의 소유겠지만 실제 주인은 사용자인 내가 된 셈인데, 하지만 지난해 초보 농군답게 농사 같지 않은 농사를 짓다보니 내가 주인이 아니라 잡초가 주인인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여름이 되자 어찌나 잡초가 기승을 부리는지 세평밖에 안 되는 데도 뽑다뽑다 지쳐서 나중에는 두 손 두 팔 다 들고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그 우거진 잡초들 틈바구니에서 상추와 방울토마토, 고추가 부실하게나마 열려 조금 씩 따먹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수확의 보람도 잠깐, 이번엔 개미떼와 선녀벌레 그리고 이름 모를 온갖 잡벌레들까지 수 없이 꾀어들어 어느 드라마에선가 탤런트 나문희가 일상 떠들던 애드립처럼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주인’이라며 세상의 벌레란 벌레는 죄다 모여들어 밭 전체가 완전 점령당해버린 것이다.

그것들을 제거하려면 강력한 농약이 필요하겠지만 가족들 건강을 생각해 인터넷에서 권장하는 천연 목초액을 만들어 분무기로 뿌려가며 개미와 벌레를 쫓았고 잡초는 틈나는 대로 손으로 뽑아보았다. 효과는 미미했지만 내 정신적 성찰의 수준은 우거진 잡초와 무수한 벌레들의 숫자만큼 심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땅은 살아있는 모두가 주인이로구나! >

지하철을 타다보면 간혹 지하철 좌석에 길게 누워 자리를 차지한 취객을 볼 수가 있다. 요즘은 승객들이 핸드폰으로 바로 역무실에 신고하여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어쩌다 그들을 보게 되면 마치 내 텃밭의 잡초나 벌레를 보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공원 벤치 중간에 쇠 칸막이를 설치하여 앉을 수는 있어도 누울 수 없는 불편한 벤치를 설치한 구청도 있었다. 이는 벤치에서 취객이나 노숙자가 드러누워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느라 그랬다고 한다.

마치 농가에서 산돼지와 고라니의 습격을 막기 위해 고압전기선을 밭과 야산 접경지역에 설치하거나 장독대를 높이고 항아리에 덮개를 씌우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좀 비약인지는 몰라도 중국 대륙도 어쩌면 거대한 종합농장 같은 느낌이 든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여러 나라의 다양한 민족들이 교대로 점령하거나 또는 여러 나라가 지역을 나누어 점거하여 왕조를 형성했기에 하는 말이다.

삼국시대, 5호16국시대, 남북조시대를 거쳐 선비족의 당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심지어 토번(티베트)족까지도 당나라의 안록산의 난 때 감숙성과 신강 위구르지역을 점령해 당에서 문성공주를 티베트 왕 송쩬감뽀에게 시집을 보내야 할 정도로 세력을 과시하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중국의 주체세력이라고 하는 한족이 중원을 점거한 시기는 고작 한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 때로만 본다면 불과 60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청나라 말기에는 유럽 열강의 조차지가 대륙 곳곳에 형성됐고 그 중 홍콩은 99년 동안이나 영국이 점령하다가 최근에야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던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도 마찬가지로 맹수와 버팔로의 땅이었는데 ‘신대륙 발견’이란 미명 하에 유럽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점거하였고, 호주 대륙 또한 캥거루의 낙원이었는데 영국에서 죄수들을 대거 강제로 들여보내 오늘날의 호주가 건설되지 않았는가.

힘이 강성한 국가가 땅을 점거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그 어떤 땅도 사실상의 주인이 없는 셈이다. 결국 땅은 누가 먼저 점거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더 힘 있게 점거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도 힘을 길러 대륙의 어느 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와 반대로 힘이 없으면 내 땅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도 중국처럼 삼국시대의 역사가 있었고 원나라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36년간이나 이웃 나라의 식민지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나라는 모두 다 침략 직후 곧바로 국력이 쇠약해져 패망의 길을 걸었다는 게 흥미롭다. 하지만 침략을 받는 동안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신고를 겪어야 했던가!

마치 내가 잡초와 각종 벌레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것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유사한 양상이 아닐까 싶다.

하여 내가 텃밭을 가꾸려면 그 어느 잡초나 벌레보다도 더 건강하고 더 힘이 있어야겠다는 각오다. 그래야 그것들을 이겨내고 싱그러운 열매와 만날 수 있기에 오늘도 열심히 준비운동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그리고 목장갑을 끼고 고무장화를 신고 차양이 긴 모자를 쓰고 또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득시글거리는 벌레들을 만나기 위해 힘차게 현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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