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용서

M스토리 입력 2022.09.01 11:08 조회수 2,780 0 프린트
 
 
 








우리는 가끔 조심하지 못해 실수하며 산다.

사소한 실수는 대개 사과하고 용서받고 가볍게 넘어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일생 동안 용서받지 못하는 심각한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가운데 또 어떤 실수는 오히려 터닝 포인트가 되어 새로운 전환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한때 디젤기관차가 서울과 지방을 오고가던 시절이 있었다. 디젤 냄새를 맡아가며 달걀도 까먹고 사이다나 맥주도 한 잔씩 나눠 마시며 합석한 낯선 승객 끼리 훈훈하게 대화의 꽃을 피웠던 낭만과 추억의 완행열차 시절!

그 시절에 나 역시 청운의 꿈을 안고 그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과 고향을 오르내렸던 적이 있었다. 하루는 토요일이라 오전에 업무를 일찍 끝내고(당시엔 토요일에도 근무했음) 고향친구들이나 만나볼까 하여 여유롭게 기차를 탔다. 마침 갈색 바바리 차림의 노신사 한 분이 먼저 내 옆 좌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좋은 일로 고향에 가시나 봅니다.”하고 내가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는 고개만 끄덕, 건성으로 응대한다. 나는 뻘쭘했지만 그래도 기차가 몇 정거장 지났을까, 맥주를 마시다 그에게 한 컵 건넸다. 그러자 그는 두 손을 내저으며 단호히 거절을 한다. <절대금주>라는 표시다.

하지만 몇 정거장을 더 지났을까, 생각지도 않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호의를 거절한 게 좀 미안했던지 금주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마 속내는 누군가와 지독히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는 과거에 술만 마시면 실수를 많이 했다고 한다. 오늘은 술로 인해 빚어진 자신의 뼈저린 실수를 말없이 눈감아준 친구에게 속죄하고 은혜를 갚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친구가 자신의 실수를 눈감아주어서 사회적으로 출세도 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는 말과 함께,

“그때는 일 핑계로 매일 술을 마셨어요. 그 바람에 알콜중독에 빠졌고, 제 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날 이후 바짝 정신 차리고 완전히 술을 끊었지요.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말입니다, 일하고 틈틈이 명상센터에 가서 명상을 했지요.”라며, 그는 매일 108참회도 하고 휴일에는 등산으로 심신도 단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진하고 단련을 해도 친구에게 끼친 실수는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 괴로워서 하루는 명상센터 원장님에게 해법을 좀 알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했다. 그러자 원장은 “네 괴로움을 가져와 봐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 “그럼 그 마음을 가져와 봐라.” 하더란다.

난감하여 그가 마음을 가져올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럼 이제 됐네.”라며 어깨를 툭 쳐주더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에선지 그날 이후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의식도 맑아지고 건강도 회복돼서 회사생활을 원만하게 마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두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가봅니다.”

그는 친구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고 싶어 며칠 전부터 계속 전화로 연락을 취하고 문자를 보내봤지만, 완전 불통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옛집을 찾아가는 길이란다. 말을 마치고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촉촉해진 그의 눈시울이 부르르 떨려보였다.

“어쩌면 그에게 옛날 일을 다시 생각나게 해 심히 불편한 일인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젠 꼭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만나서 용서를 빌고, 미흡하나마 그 친구의 마음의 상처를 보상해줘야겠어요.”

말을 나누다보니 어느 새 기차가 종착역에 멈춰 섰다. 나보다 먼저 기차에서 내려 역사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굳건하면서도 왠지 쓸쓸해 보였다.

이제는 옛날의 그런 풍경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기차를 탈 때면 그 노신사의 뒷모습이 문뜩 생각나곤 한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그날 그가 친구를 만나 얽혔던 회포를 다 풀고 다정히 어깨동무했기를 기원해 본다. 아울러 나도 그처럼 누군가 만나볼 사람이 있는가, 마음속을 더듬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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