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슈퍼커브>가 처음 발간 되었을 때, 나는 근처 동네 책방에 주문을 넣었다. 어떤 책인지도 모른 채 제목만 보고 책을 산 것이다. 만화책일 거로 생각한 그 책은 막상 펼쳐보니 라이트 노벨이었다. 여느 일본 라이트노벨과는 다르게 덤덤한 문체와 평범한 설정이어서 그랬을까? 바이크를 막 타기 시작한 당시의 나는 처음 바이크를 타게 된 주인공 코구마에게 공감하며 순식간에 책을 읽어치웠다. 반년 정도의 텀을 두며 출간된 책을 연달아 구입하여 읽으며 이와 같은 이야기에 목이 마르던 참,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일본 콘텐츠가 그렇듯 애니메이션 <슈퍼커브> 또한 원작인 소설을 충실하게 반영하였고, 애니메이션의 히트로 만화책도 발간되었다. 이번 칼럼은 애니메이션 슈퍼커브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슈퍼커브 주인공 코구마
코구마는 양친이 없고, 친구도 없고, 취미도 없는 독거 청소년이다. 꾸준히 하는 활동이라고는 학교에 다니는 것 뿐인데, 설상가상으로 그가 다니는 중학교는 오르막 위에 있다. 학교가 언덕 위에 있는 것이 만국 공통인 걸까? 그런 오르막길을 등굣길을 매일 자전거로 오르는 코구마를 보면 북악 스카이웨이의 자전거 라이더가 생각이 난다. 바이크를 타고 북악 스카이웨이를 달리다 보면 심심치 않게 도로의 맨 오른쪽에 딱 붙어 주행하는 자전거 라이더를 볼 수 있다. 자전거를 타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겠지만, 걸을 때는 평지인 줄 알았던 미묘한 오르막도 자전거를 타게 되면 페달의 무게가 달라져 순식간에 오르막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업힐을 오르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보기만 해도 그들의 신체와 체력에 감탄과 의문을 동시에 품게 된다.
코구마는 여느 때처럼 헉헉대며 자전거로 등교하다가 여유로운 호흡으로 자신의 옆을 슝 하고 지나가는 바이크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게 바이크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코구마. 엄청난 실행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는 코구마는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면서도 하교 후 곧장 동네의 오토바이 센터로 달려간다. 운이 있다고 얘기하기 힘든 그의 인생에 찾아온 커다란 행운을 만날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스쿠터를 한 대 사고 싶지만, 돈이 없다는 그에게 10만 원짜리 슈퍼커브를 권하는 센터 사장님, 사람을 죽인 바이크라는 말에도 끄떡하지 않고 곧바로 계약하고 아라이 헬멧까지 사은품으로 받는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10만 원에 슈퍼커브를 판 것도, 한국판매가 20만 원대의 아라이 오픈페이스 헬멧을 사은품을 준 것도 아닌 바이크를 사고 싶다고 센터에 찾아간 중학생에게 진지하게 판매를 한 점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코구마의 슈퍼커브 인생이 시작된다.
슈퍼커브의 주역 삼인방 왼쪽에서부터 레이코, 시이, 코구마
애니메이션 슈퍼커브를 보면 일본에서 슈퍼커브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반에서 슈퍼커브를 탄다고 얘기하자 돌아오는 반응은 ‘그건 바이크라기보다는 스쿠터잖아’ (스쿠터는 발판이 있는 거라고!) ‘커브는 음식 배달이나 신문 배달할 때 타는 거지?’ ‘우리 할아버지도 그거 타’ 등… 과거 시티백을 탔던 내가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다. 하지만 그런 코구마에게 ‘슈퍼커브 탄다고? 보여줘’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 나타난다. 그는 같은 반의 레이코로 코구마와 다르게 동급생들과 사이가 원만해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혼자 어디론가 없어지기도 하는 약간은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 함께 내려가고, 레이코는 코구마의 슈퍼커브를 요리조리 살피며 얘기한다. "카뷰레터 방식의 최상품 커브잖아! 주행거리는 500km를 조금 넘었고… 타이어도 아직 새거네. 헬멧은 아라이 클래식이구나. 커브와 아주 잘 어울려. 내 헬멧은 쇼에이 호넷이야. 장갑은 어떤 걸 껴? 그립스와니구나!"라며 레이코는 코구마가 모르는 슈퍼커브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을 뽐내며 커브는 멋있다며 순수한 감상을 내비친다.
바이크용 글러브로 미끄럼 방지 목장갑을 쓰는 터프한 레이코는 혼다 MD90 우편 커브를 탄다.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본인 바이크 자랑을 시작한다. ‘이건 조작하는 맛이 없는 전자 제어로 바뀌기 전의 커브지. 이걸 손에 넣은 다음에 이것저것 개조해서 속도를 꽤 낼 수 있게 해놨어. 엔진과 브레이크 부품, 서스도 타케가와 제품이야. 머플러는 원오프의 티탄이야. 톤다바야시의 바이크 가게를 다시 지을 만큼 갖다 바쳤지. 같은 커브를 타는 사람을 알게 돼서 기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마냥 듣고 있던 코구마를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얘기를 이어 나간다. ‘이렇게 커브를 타고 있으면 비록 멈춰 있어도 내가 어디로든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렇게 인연이 된 코구마와 레이코. 늘 가든 하굣길을 달리든 코구마는 ‘커브니까 어디든지 갈 수 있어’라는 레이코의 말을 떠올리다 처음으로 낯선 코너를 돌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게 된다. 그것은 계획하지 않고 떠나는 작은 여행일지도 모른다. 커브가 아니더라도, 바이크가 아니더라도 나만의 교통수단이 생겼을 때의 기분은 비슷하지 않을까? 평소라면 돌지 않았던 모퉁이를 돌며 작은 해방감을 느끼는 코구마는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을 그리며 하굣길을 기대하게 된다.
이 작품의 묘미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라이더로써의 성장하는 코구마이고 두 번째는 바이크를 통해 만난 인연인 레이코와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편안한 등굣길을 위해 선택한 바이크이지만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흑백이던 풍경은 컬러로 바뀌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녀는 바이크를 타는 소녀가 되어간다.
코구마와 레이코의 관계는 친구라기보다는 같은 커브를 타는 동료에 가까워 보인다. 동갑에, 같은 반에, 같이 점심도 먹는데 둘은 친구라기엔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주의적인 각각의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흥밋거리가 바이크뿐인 걸까? 만나서도 개인적인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바이크 얘기만 한다. 그것도 얘기를 나눈다기보다 레이코가 바이크 얘기를 다다다 늘어놓고, 코구마는 대체로 듣는 쪽이다. 코구마가 말을 꺼낼 때는 질문이 생겼을 때인데, 그럴때 레이코는 훌륭한 바이크 선배이자 조력자가 되어준다. 코구마가 탑 박스를 달고 싶어 하니 레이코는 전화 한 통으로 지인에게 남는 탑 박스를 얻게 해준다. 또 헬멧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 헬멧에 실드를 달 수 있다는 것 등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해서 코구마가 그 도움에 이끌려가기만 하지는 않는다. 레이코의 아는 사람에게 받은 탑 박스는 직접 뚝딱뚝딱 달고, 생각보다 비싼 실드 대신 공사할 때 쓰는 저렴한 보안경을 선택하는 등 도움과 자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착실하게 라이더가 되어간다.
주인공이 바이크를 탄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 물인 <슈퍼커브>이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안전을 우선시하고 생활형 라이더인 코구마와는 다르게 아날로그하고 거친 것을 좋아하는 레이코의 대비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까지 적절한 변주와 재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가한 주말에 애니메이션 <슈퍼커브>를 보기 시작한다면 두 편을 넘기지 못하고 곧장 헬멧을 꺼내 들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 한 번도 돌지 않은 코너를 돌아서 새로운 길을 향해 스로틀을 당기고 싶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