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화에 소개했던 가와사키 Z300은 예상만큼 새로웠고, 기대보다 재밌었다.
매번 다른 장르의 바이크를 타는 것에 맛들린 나는 이번에는 오프로드 바이크를 빌려보기로 마음먹었다. Z300을 대여했던 바이크 렌트샵 KUMI PAI에 문의해 보았지만, 네이키드와 소배기량 스쿠터만 구비되어 있었다. 근처의 다른 렌트샵에 가보았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혼다의 CRF250과 가와사키의 듀얼 바이크인 KLX150, KLX250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KLX 250의 시트고는 CRF250과 비슷하게 높아 보였다. CRF도 버거운 나에게 비슷하게 높은 시트고의 바이크를 렌트하는것이 모험처럼 느껴져서 시트에 앉아볼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런 바이크 탈 줄 알아?”라며 비아냥 대서 조금 기분이 상했다. 탈 줄 알고, 시트고가 좀 높아 보여서 한번 앉아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고 얘기한 후에야 시트 위에 앉아볼 수 있었다. 바이크들이 모두 가깝게 주차되어 있고, 내가 앉아봤던 바이크들의 앞바퀴가 인도의 턱에 살짝 올라가 있어서 착지성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지로 빼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으나 바로 거부당하고, 다른 바이크샵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볼 만한 바이크샵은 숙소 바로 옆에 있는 곳이라, 우선 가는 길에 발견한 식당에서 아점을 해결하기로 했다. 분명 식당에 앉았을 때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주문한 국수가 나오니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금세 도로가 흠뻑 젖었다. 10분이 지나자,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하늘이 개었다. 몇 일 전까지만 해도 비 내리는 날이 별로 없었는데 갑자기 우기가 시작된 걸까? 다시 비가 올까 봐 불안했지만, 어차피 스콜은 갑자기 오는 만큼 금방 그치니까, 비가 오면 잠시 멈춰서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렌트 샵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세 번째 렌트 샵에 도착하니 KLX250도, 150도 모두 대여 중인 상황. KLX는 구경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두 번째 렌트샵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며 렌트 샵 앞을 서성였다. 그러던 와중 작고 귀여운 오프로드 바이크 한 대가 렌트 샵 앞에 멈췄다. 가와사키의 D-tracker를 대여한 여행자가 반납하러 온 것이었다. 마치 내가 그 바이크를 기다린 것처럼, 운명처럼 나타난 바이크를 바라보았다. 앉아보지 않아도 낮아 보이는 시트고에다가 깍두기 타이어까지. 지금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D-tracker를 빌리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헬멧을 도둑맞은 후로 바이크를 빌릴 때마다 렌트 샵에서 헬멧을 빌리고 있었다. 렌트샵에 구비된 헬멧들은 사이즈 문제도 문제지만-가장 작은 게 L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내피가 아예 없다던지, 주행 중에 실드가 마음대로 내려온다든지 하는 큰 하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빌린 헬멧은 그나마 사이즈가 맞고, 턱 끈도 잘 닫히고, 실드도 문제없이 작동했다.
대여 절차를 마치고 글러브를 끼며 출발하려 하는데,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서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가랑비일 거라고 생각하고 예정대로 출발하는 두 가지 선택지 중 나는 출발을 택했다. 낮에 그렇게 쏟아졌으니 이번엔 그냥 가랑비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D-tracker의 첫 시승 감은 ‘아주 미끄럽다’였다. 타이어 마일리지가 별로 남지 않아서인지, 깍두기 타이어여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끄러져 흔들거리는 느낌에 당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빗줄기는 맞으면 따가울 정도로 굵어졌다. 정신없이 바이크를 세우고 눈앞에 보이는 파라솔 앞으로 비를 피했다. 파라솔은 작은 과일 노점의 것이라 멜론 한 봉지를 시키고는 멍하니 비가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비가 바로 그치지 않아서 그저 거리를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분명히 나처럼 맨몸이었던 거리의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순식간에 모두 우비를 입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멜론을 다 먹고 10분이 넘게 기다린 후에야 비가 그쳤다. 비는 오는것도, 그치는 것도 순식간이다. 1분 전까지만해도 우비를 입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차림이 바뀌었다. 태국의 우기란 이런 거구나. 쭉 지켜보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나도 아무렇지 않게 시동을 걸고 가던 길로 나갔다.
큰비가 내렸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 바싹 마른 도로에 기분이 좋다. 정처 없이 직진하다 보니 타이어의 밀리는 느낌에도 익숙해졌다.

다음 날 아침, 바이크를 타고 늘 가던 메인로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아점을 먹으러 나왔다. 며칠 전부터 템페가 먹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온 곳이었다. 템페는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으로, 삶은 콩을 뭉쳐서 발효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하다. 요리법은 마치 두부의 요리법과도 같은데, 튀기거나 구워서 먹는 경우가 많다. 구운 템페와 밥, 각종 야채와 참깨와 코코넛이 들어간 소스가 곁들어진 템페 플래터로 배를 가득 채웠다.
천천히 밥을 먹고 식당에서 여유를 즐기니 바이크 반납 시간이 1시간 남았다. 마지막 라이딩의 도착지로는 근처 사원으로 정하고, 태국적인 풍경의 사원 앞에서 바이크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가볍고 시트고가 낮아 오프로드에서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D-tracker가 만약 한국에서 정식 수입되었다면, 나는 굳이 버거운 CRF250을 샀을까? 물론 핸들은 가볍고 타이어는 밀려서 처음에는 어버버 댔지만 바이크를 반납할 때쯤에는 더 적극적으로 운전하며 D-tracker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도로 중간중간 산길의 입구가 나올 때마다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유혹이 있었지만, 지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오프로드를 달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언젠가는 빠이에서 만난 라이더들과 함께 임도를 달릴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