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다 아랫집 농부 심선생을 만났다. 연일 햇살이 뜨거워 외출을 하지 못하다가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그도 나만큼 반가웠던지 싱끗 웃고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비닐봉지에 햇고구마를 한가득 담아 내준다.
그의 인사법은 늘 그랬다. 7월에는 찰옥수수를 따서 그렇게 한 아름 안겨주더니 하지 때는 하지감자를 캐서 잔뜩 안겨주었고 이번엔 햇고구마다. 그런데 나는 그의 호의에 대해 보답은커녕 제대로 이행조차 못해 쑥스럽다.
저녁에 그 햇감자를 먹어보려고 찜통에 찌다가 그만 까맣게 태워버렸던 것이다. 감자를 물에 씻어서 찜통에 넣고 인덕션을 켜고 감자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유튜브에서 액션영화를 한 편 본다는 게 그만 깜빡, 어디선가 풀풀 탄내가 흘러와 코를 찔렀다. 아차, 싶었다. 허둥지둥 주방으로 달려가 인덕션을 끄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냄비 뚜껑을 열어젖혔다. 뜨거운 김과 연기가 왈칵 버섯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숯덩이 같은 까만 눈으로 감자알이 나를 올려다본다. 아, 군 감자! 순간 엉뚱하게도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아궁이에서 부지깽이로 꺼내 주셨던 그 재 묻은 감자이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경우야 어떻든 탄 맛은 추억의 맛이지 싶다. 군 감자뿐 아니라 군고구마, 군밤, 군만두… 그리고 구수한 누룽지까지...
언젠가 지인 P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어머니가 떠드린 누룽지숭늉을 훌훌 마시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우리네 고유의 맛이랄까, 동네 슈퍼 진열대에 각종 달콤한 과자들 사이에 누룽지 상품이 다양하게 비치돼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맛을 즐기고 찾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섬(島) 시를 많이 쓰신 원로시인 이생진 선생님도 아침식사로 누룽지를 끓여서 한 공기씩 잡수신다 했다. “섬을 돌아다니시려면 잘 잡수셔야할 텐데 그렇게 드셔서 되겠어요?”라고 여쭙자 “소화가 잘 돼서 그래.”라고 들려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화가 잘 된다는 것은 몸이 잘 받는다는 것. 곧 몸에 익숙하다는 것이리라.
이선생님처럼 누룽지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대체로 익숙한 음식인 것 같다. 맛으로도 오미(五味)인 신맛, 쓴맛, 짠맛, 단맛, 매운맛 못지않게 다정하다. 게다가 쌀알에 섞인 잡곡에 따라 또 태운 정도에 따라 향과 맛도 다양하다.
끊을 수 없는 맛이다.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 것이다.
탄맛 때문일까? 그런지도 모른다. 하여 어떤 특정 커피전문 업체는 커피원두를 일부러 적당히 태워서 탄맛을 낸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탄맛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카페도 있다.
몇 해 전, 초가을이었다. 직원들과 지방출장을 마치고 승용차로 귀경하던 길에 잠시 시외의 한적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그런데 주문한 커피를 다 마셔갈 쯤 카페 여점장이 주방에서 나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처음엔 개업 초기라 ‘찾아줘서 고맙다’는 감사인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커피콩을 너무 태워서 송구하다. 다시 로스팅해서 커피를 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는 커피 애호가인 직원 K의 눈을 바라보았다. K는 ‘괜찮은데’ 하는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적으로 다소 여유가 있었고 카페 여점장의 표정이 너무나 간곡하여 우리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잘 볶아서 정성스레 내린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게 되었는데 솔직히 나는 먼저 마신 탄 맛 나는 커피가 더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암암리에 탄맛 커피에 길들여져 있었거나 아니면 이미 갈증이 채워진 이후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맛이 덜해졌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손님과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여점장의 정성이 우리를 진하게 감동시켰다. 하여 우리는 커피 맛이 좋았다고, 잘 마셨다고 아낌없이 칭찬을 건네주고는 기분 좋게 귀경 길에 올랐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커피를 마실 때면 가끔 그녀의 진지한 모습이 가을바람처럼 느껴진다.
누가 가을바람에 떨어진 낙엽을 태울 때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어느새 낙엽이 흩날리고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짙다. 서산(西山)이 온통 붉게 타는 것만 같다. 그러나 노을은 탄내가 나지 않는다. 뜨겁지도 않고 재도 날리지 않는다. 추억처럼…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의 가슴을 부단히 태웠을 그 못난 추억도 냄새가 없다. 다만 가슴이 쓰리고 코끝이 찡할 뿐이다.
그 노을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보냈다. 아내에게도 보냈더니 누구보다도 먼저 댓글을 달았다.
<사진작가로 입문하셔. 멋있다.>
함께 살면서 모처럼 들어본 아내의 칭찬이다. 고래처럼 춤을 춰야하나! 노을이 고마웠다. 화답으로 아내에게 노을빛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놓고 고구마를 씻었다. 이번엔 검게 태우지 말아야지, 각오하며 고구마를 찜통에 넣고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5분 후에 불을 끄고 뜸을 들이다 껍질이 살짝 탈 때 쯤 꺼내자! 긴장을 해서 그랬나, 다행히 고구마는 구운 듯 잘 쪄졌다. 하나 먹어보니 밤고구마였다. 언젠가 점심 때 어머니와 찐 고구마를 먹다 목이 메어 가슴을 치며 고추장냉국을 훌훌 마셨던 기억이 반달처럼 가슴에 떠오른다.
노을이 지고 어둑어둑해진 서산의 실루엣을 바라본다. 문득 오래 전 그 카페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세월이 꽤나 흘렀으니 어쩌면 그 여점장은 반백의 중년이 돼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적당히 탄맛을 가미한 원숙한 커피 맛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된다. 그때 함께 커피를 마셨던 직원들과도 같이 가서 그 맛을 보고 싶다. 나름 적정한 자기기준을 갖고 사는 삶이 얼마나 멋진가! 새삼 느껴지는 가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