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사랑의 신호수

M스토리 입력 2025.10.17 14:01 조회수 796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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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七夕)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4층에서 두 사람이 더 탔다. 한 사람은 검은 베레모를 쓴 청년이었고 또 한 사람은 중년인데 등에 ‘신호수’란 글자가 새겨진 푸른색 등산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신호수가 뭐지? 생경했다. 나팔수, 엿장수, 소장수, 장기수...는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생각이 짚이지 않았다. 하여 그에게 물었다.

“신호수가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공사현장에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통제신호를 보내주는 사람입니다’라고 간단히 설명해준다. 순간, ‘너 건축공학과 출신 맞아?’라고 나는 나 자신을 질책했다. 쑥스럽게 시리…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렸다. 칠석날 소나기가 간헐적으로 내리더니 그날도 아침에 살짝 보슬비가 내렸다. 견우와 직녀가 1년 만에 만나 눈물을 흘리고 아침에 이별하느라 또 눈물을 뿌리는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기생 홍랑과 최경창 시인이 우여곡절 끝에 이별하며 흘리던 눈물을 생각하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견우와 직녀처럼 이별하며 홍랑이 최경창에게 건네준 시(詩)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 땅 기생이었다. 기생이지만 그녀는 시인이며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지에 묻힐 만큼 절개와 품격이 있는 여인이었다.

언젠가 봄에 사진기를 메고 홍랑과 최경창이 묻힌 파주 청석골에 가본 적이 있었다. 본처가 아니라서 합장을 하진 못했지만 최경창의 묘아래 작지만 단정하게 조성된 홍랑의 묘와 그 앞에 세워진 시비를 읽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함경도 기생 홍랑이 어떻게 천리 길 경기도 파주에 와서 그것도 해주 최씨네 묘지에 당당히 묻힐 수가 있었을까?
 
그들이 만난 것은 조선 선조6년(1573년)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9년 전, 그러니까 삼당파(三唐派) 시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과거에 급제하여 북도평사(北道評事.정6품)를 제수 받아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던 때였다. 당시엔 공무원이 임지에 갈 때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없었으므로 홍원을 지나다 관기인 홍랑을 만나 함께 경성으로 가서 군막(軍幕)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연이랄까. 그들의 동거생활은 시 동인으로서, 연인으로서 지극히 원만했던가보다. 이듬해 1574년 봄, 최경창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근하게 되자 그녀도 따라나섰다. 하지만 당시엔 함경도 기생은 함경도를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경계선인 함관령 고갯마루에서 부득불 헤어져야만 했다.

그날 봄비가 내렸던가보다. 하여 홍랑은 암담하고 참담한 심경을 마치 길가에 늘어진 버드나무(기생을 비유)를 꺾어 보내는 심정으로 최경창에게 이별의 시를 건네주었다. 비록 자신의 몸은 따라가지 못하지만 창밖에 심어놓은 버드나무처럼 마음은 항상 지근에 있을 테니 편히 주무시고 건강하시라고…

그러나 그녀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간 최경창은 1년 후에 그만 깊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된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홍랑은 7일 밤 7일 낮을 쉬지 않고 걸어 서울로 올라와 정성으로 1년간 병 수발을 든다. 하여 최경창의 병을 완쾌시키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고 당쟁에 휘말려 결국 최경창은 벼슬을 내려놓게 된다. 홍랑 역시 이듬해 여름에 쓸쓸히 홍원 관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번엔 최경창이 홍랑에게 이별의 시 ‘증별(贈別)’을 건네준다.

서로 오래오래 바라보자고 향 그윽한 난초를 드리네//하늘 끝 먼 곳이지만 가는 듯 수일 내 돌아오리니//함관령 옛 노래는 부르지 마소//지금 비구름이 짙게 청산을 감싸고 있으니.
相看脈脈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상간맥맥증유란, 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막창함관구시곡, 지금운우암청산)

난초는 선비의 상징이요 청산은 최경창 자신의 몸을, 짙은 운우(雲雨)는 눈물어린 마음을 비유한 말일 터. 이 시는 함경도 함관령 고갯마루에서 홍랑이 최경창에게 건네준 버드나무 시(詩)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들이 뿌린 눈물 같은 비는 칠석 이후에도 간혹 내렸다. 하지만 올해는 열대야가 기승을 부려 누구나 그랬듯이 나 역시 여름 내내 정신없이 헤매야 했다. 하여 가끔 유튜브에서 더위를 식혀줄 노래를 찾다보니 우연히 영국의 인기가수 엥겔버트가 부른 <푸른 눈의 스페인 여인(Blue spanish eyes)>을 듣게 되었다.

블루 스페니쉬 아이(eyes)/울고 있군요/제발 울지 말아요/잠시 안녕 하는 거니까/당신에 사랑 듬뿍 가지고 금방 돌아올게요/‘알았다’ ‘기다리겠다’ 말해주세요/블루 스페니쉬 아이(eyes)/멕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여/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웃어주세요/당신에 사랑 듬뿍 가지고 금방 돌아올게요.

시대와 대륙은 달라도 사랑과 이별의 감정과 표현은 한결같은가 보다. 홍랑의 버드나무의 ‘새잎’과 최경창의 ‘난초’와 ‘청산’ 그리고 엥겔버트가 노래 부른 스페인 여인의 ‘푸른 눈’이 마치 ‘깔맞춤’한 듯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듯이 그들의 시와 노래는 오로지 생생하게 푸른빛으로 점철된 이별, 그러나 재회를 희구하는 열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사무실 마당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가을바람에 손바닥 같은 단풍잎이 허공에 떠올라 하염없이 흩날린다. 올가을엔 이별 없는 사랑만 하라고 붉디붉은 수신호를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보내주고 있었다.

본 기사를 끝으로 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지금까지 ‘문화 산책’을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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