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은 천자가 하늘의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명과 청에 사대한 조선은 환구단을
세우고 상제에게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을 선언한 새로운 국가의 탄생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과 13년 뒤인 1910년, 조선(대한제국)은 일제에 병합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겉으로는 근대 국가를 표방했지만, 그 이면에는 내부의 부패, 외세의 침탈, 근대화의 실패가 얽혀 있었다. 조선의 멸망은 단순히 외세의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와 선택의 실패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19세기 조선은 ‘은둔의 나라’라 불릴 만큼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거부했다. 청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정세 변화를 외면했다. 그러나 1860년대 이후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로 몰려오자, 조선의 쇄국은 곧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펴며 외세의 침략에 맞섰지만, 이는 근대화의 기회를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원군의 집권은 중앙집권 강화와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긍정적 면이 있었지만, 서구 문명과 기술의 도입에는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과 같은 근대화의 바람은 조선을 비껴갔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허용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은 조선을 “동양의 마지막 미개지”로 보고 세력 확장을 노렸다. 조선의 개화파와 수구파는 ‘어떻게 근대화를 이룰 것인가’보다 ‘누구의 힘을 빌릴 것인가’를 두고 싸웠다. 그 결과는 외세의 내정 간섭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일본의 조선 진출 구실이 되었다. 같은 해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고종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이는 ‘국호만 바꾼 조선’에 불과했다.
조선 말기의 정치 구조는 이미 심각하게 부패했다. 세도 가문은 권력을 세습했고, 탐관오리는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 개혁의 기회는 번번이 사라졌다. 갑오개혁(1894~1896)은 일본의 압력 속에서 추진되어 ‘자주적 개혁’이 아닌 ‘타율적 개혁’으로 전락했다. 고종은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했다. 청과 일본 사이에서, 나중에는 러시아와의 연대를 모색하며 국권을 지키려 했지만, 어느 쪽에도 확실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은 일본의 조선 장악 의도를 극명히 보여준 비극이었다. 왕실의 권위는 추락했고, 민심은 혼란에 빠졌다.
19세기 말 조선의 경제는 이미 자립 기반을 잃고 있었다. 일본과 체결한 각종 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시장은 일본 상인들에게 개방되었고, 토지와 자원이 유출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미곡과 면화, 인삼을 헐값에 수입하고, 자국 상품을 고가로 판매했다. 조선의 상공업은 급속히 붕괴했고, 농민들은 세금과 지주제의 이중고로 몰락했다. 개화파가 추진한 근대 산업화 계획은 자금과 기술 부족, 그리고 관료 부패로 좌초했다. 은행, 철도, 광산 등 국가 기간산업은 일본 자본에 장악되었다. 근대화는 “자주적 발전”이 아니라 “식민지적 근대화”로 전락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은 더이상 독립국이 아니었다.
조선의 몰락은 단지 정치 지도층의 무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농민과 민중의 절규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의병항쟁, 애국계몽운동 등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중앙의 분열과 열강의 냉혹한 계산 속에서 그들의 희생은 체제 변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사회구조 역시 봉건적 잔재에 묶여 있었다.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894년이지만, 실질적 평등은 요원했다. 교육과 정보의 불평등은 계층 이동을 차단했고, 개혁의 동력은 형성되지 못했다.
조선의 멸망은 한 시대의 종언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화는 조선 사회의 강제적 근대화를 촉진했다. 철도, 도로, 통신망이 들어섰고, 교육 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유는, 내부의 기득권 구조를 혁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 체제의 변화 속에서 ‘쇄국과 고립’을 택한 대가는 혹독했다.
망국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가 자주성을 잃을 때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조선의 붕괴는 외세의 힘에 의한 강제 병합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내부의 부패와 무능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눈을 감고, 민중의 요구를 외면한 정치 체제는 결국 스스로 무너졌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의 망국을 돌아보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존립이 ‘자주성’, ‘개혁’, ‘통합’ 위에 서야 한다는 교훈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지만, 무시할 때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부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 기사를 끝으로 ‘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지난 연재를 통해 조선의 건국에서 멸망까지 이어진 역사의 흐름을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