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을사늑약(乙巳勒約)

M스토리 입력 2025.09.16 14:59 조회수 80 0 프린트
을사늑약 체결 이후 촬영된 기념 사진. 사진 가운데가 이토히로부이며, 그 왼쪽이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주차군사령관, 오른쪽이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1905년 11월,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이 주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첫걸음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친일 매국노들은 역사에 오명으로 남았다. 을사늑약이 조선과 일본에 미친 영향, 그리고 을사오적의 행태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게 된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외교권 박탈이었다. 을사늑약 제2조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대한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및 지도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대한제국의 외교 및 영사권을 대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더이상 국제 사회에서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는 국권 피탈의 수순을 밟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어져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에 전시된 을사늑약 문서.
을사늑약은 또한 조선 민중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는 곧 의병 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 저항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민영환, 조병세 등 수많은 지식인과 관료들이 을사늑약에 항의하며 자결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을사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독립을 향한 열망을 불태우게 되었다. 비록 의병 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무력 진압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이는 훗날 3.1운동과 독립군 활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일본에게 을사늑약은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성장했다.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면서 일본은 조선반도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계였다.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 했으며,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전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즉, 을사늑약은 단순한 한반도 침략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확장을 의미했다. 또한, 을사늑약은 일본 내부의 군국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일본의 군부 세력은 더욱 힘을 얻었고, 이는 결국 일본이 주변국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을사늑약 체결에는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대신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외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민영환(서명 거부, 대신 이완용이 서명), 법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들은 개인적인 영달과 권력 유지를 위해 나라를 팔아넘기는 매국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행태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남긴다.
 
을사늑약을 풍자한 만평. 일본군이 칼로 고종을 위협하는 모습. 다만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은 그 자리에 없었다
첫째, 지도자의 올바른 가치관과 책임감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을사오적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시기에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매국 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지도층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둘째, 정의로운 역사관의 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 을사오적은 훗날 친일 세력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매국 행위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을 '오적'으로 기록하며 그들의 죄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역사관을 가지고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미래 세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셋째, 국민 개개인의 역사 인식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을사늑약 당시 백성들은 이 사실에 분노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나라를 팔아넘긴 이들은 소수의 매국노였지만, 그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이들은 수많은 백성이었다. 을사오적의 사례는 국민 개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주시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비극적인 식민지 역사를 시작하게 한 아픈 역사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약소국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보여준다.

을사오적의 행태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비난을 넘어서,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기회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우리는 그들의 오명에서 배우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의 거울이며, 우리는 그 거울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되새기며,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황춘식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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