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은 조선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개항기와 대한제국 성립 직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벌어져, 조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갈등은 단순히 고부간의 권력 다툼을 넘어, 당시 조선이 직면했던 내외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국권 상실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는 서원 철폐, 호포제 실시, 비변사 혁파 등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며,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이는 봉건 질서를 유지하고 외세로부터 조선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러나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선언했고, 이를 계기로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민씨 척족 세력을 규합하여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 하면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동반자로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달리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외세와의 관계를 모색했다. 특히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주목하여 친러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립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당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 즉 쇄국이냐 개방이냐, 전통적 가치 유지냐 근대화 수용이냐 하는 이념적, 정책적 노선 차이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립은 여러 주요 사건을 통해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73년 대원군 하야와 함께 명성황후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종의 친정 선언을 계기로 명성황후는 최익현 등의 유생들을 통해 대원군을 탄핵하게 하고, 대원군의 11년간의 집정을 종결시켰다. 이로써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씨 척족의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임오군란 (1882년)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던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은 민씨 정권의 부패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명성황후를 해치려 했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추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여 민씨 정권의 정책을 되돌리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문단을 파견하여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과의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 내 입지도 강화되었다.
갑신정변 (1884년)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화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급진 개화파(김옥균, 박영효 등)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급진적인 근대화를 목표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명성황후가 주도하는 민씨 척족의 친청 수구 세력을 배척하고, 대원군의 조기 귀국을 주장하는 등 권력 구도의 변화를 꾀했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조선의 자주적인 개혁 추진 능력이 부재함을 드러냈고, 청의 간섭을 더욱 심화시켰다. 또한 청과 일본 간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다툼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내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갑오개혁 (1894년)은 청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추진된 개혁이다. 일본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다시 앞세워 고종과 명성황후를 견제하려 했다. 대원군이 초반 개혁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결국 일본의 의도대로 개혁이 진행되면서 명성황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친러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갑오개혁은 조선의 자주성을 침해하면서도 일부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친러 정책은 일본의 심한 반발을 샀고, 이는 결국 을미사변의 배경이 되었다.
을미사변 (1895년)은 명성황후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결국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궁궐로 들여보내 사건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는 것처럼 꾸미려 했다.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으며, 항일의병활동(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어,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이는 조선이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잃고 열강의 각축장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첫째, 국력 소모와 외세 의존이 심화되었다. 두 권력 주체가 서로를 견제하고 실각시키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조선의 국력은 심하게 소모되었다. 청,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은 이러한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내정 간섭을 심화시켰다. 이는 결국 조선의 자주권을 약화시키고 식민지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 개혁 추진이 지연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고수와 명성황후의 외세 의존적 개화 정책은 국가적 차원의 일관성 있는 개혁 방향을 설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관성 있는 개혁과 외교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권력 싸움에 몰두하면서, 조선은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고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게 되었다.
셋째, 민심 이반과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다. 권력 다툼 과정에서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가 심화되고, 경복궁 중건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는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는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과 불만을 증폭시켜,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 활동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넷째,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극심한 권력 다툼은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특히 국모 시해라는 비극적인 을미사변은 왕실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드러내며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은 조선 말기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조선이 주권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들의 갈등은 한 시대의 권력 다툼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파급력을 가졌던 역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