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아편전쟁

M스토리 입력 2025.05.19 21:01 조회수 1,665 0 프린트
아편전쟁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증기선 네메시스가 청나라 함선을 파괴하는 모습


19세기 중엽, 아편전쟁은 단지 청나라만의 국난이 아니었다. 이는 중화 중심의 오랜 조공체제를 기반으로 유지되던 동아시아 질서가 서구 열강의 무력과 자본에 의해 무너지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무기력하게 개항했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로 인해 주변국이었던 조선, 류큐, 베트남 등도 거대한 외교적 충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은 수백 년 동안 ‘사대외교’를 바탕으로 청나라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소중화’로 여겨왔다. 하지만 청의 굴욕적인 패배와 외세의 침탈은 조선에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조선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전환을 야기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청과의 사대관계(事大關係)를 중심으로 국제 관계를 정립했다. 이는 중화문명에 대한 존중과 자주적 실리를 동시에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사대(事大)는 명나라(후에는 청나라)에 대해 형식적으로는 예를 갖추되, 실질적으로는 내정에 간섭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한편, 일본·여진족·류큐 등 주변국과는 교린관계(交隣關係)를 통해 국경을 안정시키고 무역을 유지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외교 체제는 조선의 안정적인 국제 입지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이 체제는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로 인해 점차 흔들리게 된다.

청나라 군을 공격하는 영국군.

아편전쟁(1840~1842)의 소식은 비교적 빠르게 조선에 전달되었다. 조선은 청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전쟁의 전말, 난징조약의 내용, 홍콩의 할양 등의 정보를 입수하였다. 특히, 청 조정이 전쟁에 패하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지배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은 이전까지 청을 ‘천조(天朝)’로 존중해왔으며, 중국의 문물과 질서를 그대로 본받아 운영해왔다. 그런데 그런 청이 ‘서양 오랑캐’에게 패했다는 사실은 곧 조선의 세계관과 대외정책에 뿌리 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외세의 무력과 문명이 이전의 인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인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초기 반응은 근대화로의 전환이 아니라, 쇄국 강화였다. 외세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식은 서양과의 접촉을 단절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척화주의(斥和主義)의 대두이다. 척화는 “오랑캐와는 화해할 수 없다”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념이었다.

1845년, 조선의 고종실록에는 “서양 오랑캐들이 청나라를 침략했다”는 기록과 함께, 외국 선박이 접근하면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무력으로 서양 세력을 배격하는 정책을 지속하였다. 이는 아편전쟁의 충격이 조선에서 보수적 반응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이하 대원군)은 1863년부터 섭정을 시작하며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강경한 쇄국정책을 추진했다. 대원군은 서구 열강이 조선에 침입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외교·군사 조치를 단행했다. 가장 상징적인 조치가 척화비(斥和碑)의 건립이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전국 주요 길목에 세워진 이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면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고, 화친하면 나라가 망한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아편전쟁의 교훈을 조선식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대원군은 청나라가 서양에 무릎을 꿇은 것을 보며, 조선은 청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그는 서양 선교사의 전도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외국 선박이 출몰하면 포격하라는 명령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같은 고립주의적 대응은 외세를 자극했고, 프랑스(병인양요), 미국(신미양요), 일본(운요호 사건) 등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자각하고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다. 비록 부분적 개혁이었지만, 군사·산업·교육 부문에 서구 문물을 도입하려 했다. 조선의 일부 개혁적 지식인들은 청의 이런 노력에 주목하고, 조선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규수,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開化派)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서구 문명을 ‘오랑캐’가 아닌 기술과 제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조선의 국방력과 경제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아편전쟁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반면교사로 삼게 한 사례였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위협하고, 결국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식 외교 체제를 받아들이는 최초의 근대 조약이며,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다. 조선은 자주국임을 선언 (청의 종주권 부정), 부산 등 3개 항구 개항, 일본인 치외법권 인정, 양국 간 무관세 무역 허용 등이다. 이는 조선 외교 정책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 ‘외세 배척’에 머물렀던 조선은, 개항과 함께 국제질서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곧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아편전쟁은 청나라의 운명을 바꾸었지만, 그 여파는 조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전쟁을 통해 조선은 외세의 위협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었다. 보수적 대응은 대원군 중심의 쇄국 강화, 척화주의, 무력 배격과 개혁적 대응은 개화파의 등장, 문물 개방론, 근대화 주장이다.

이 두 흐름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정치 갈등과 외교 노선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사늑약 등을 거쳐 조선의 근대와 식민의 경계로 연결된다.

아편전쟁은 단순히 중국의 패배가 아닌, 동아시아 질서 붕괴의 신호탄이었으며, 조선에게는 자주와 개방, 혹은 고립과 쇄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외교적 갈림길이었다. 조선이 경험한 수많은 외교적 위기와 혼란은 바로 이 전쟁이 남긴 그림자 속에서 비롯되었다. 

황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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