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홍경래의 난

M스토리 입력 2025.04.01 15:26 조회수 718 0 프린트
 
홍경래진도. 1812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진압 당시 중앙에서 파견된 선전관이 군병에게 음식을 베풀고 그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제작한 전쟁 기록화. 순무영군진도 또는 정주성공격도라고도 불린다.
 
순조 시대 이앙법의 보급 등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화폐경제, 상품경제의 발달은 조선 사회의 근간인 신분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자영농 중심의 농촌 사회는 급격히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의 길로 나아갔다. 자영농에서 부농으로 성장한 평민들은 이제 양반으로서의 신분 상승을 꾀했고, 길은 많았다.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곡식을 바쳐(납속) 합법적으로 양반을 사거나 몰락한 양반으로부터 족보를 사는 편법까지 양반으로 가는 길은 다양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의 수가 전체 인구의 7%에 그치던 것에 반해 양반의 수는 갈수록 늘어 이즈음에는 이미 전체 인구의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양반이 늘면서 양반이 못된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각종 부담이 더욱더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상민 신분의 농민들은 점점 몰락해 소작농이 되거나 혹은 광산 등의 임노동자로 바뀌어 갔다. 이제 세상은 옛날처럼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고정된 세상이 아니라, 세상은 사농공상의 귀천 의식도 전처럼 절대적이지 않다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고 죽도록 일해도 빼앗기고 나면 굶주리기 일쑤인 처지에 대해 분노가 자라났다.

순조 11년 이래 젊은 왕은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접견 자리에 다 나아가는 등 지나치게 정사에 힘써 신하들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왕이었다. 건강이 채 회복되기도 전인 12월 20일 평안도에서 급보가 도착하니 난이 일어나 고을이 하나씩 점령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정예부대 수백 명이 급파되었다. 홍가라고 보고된 난의 주동자는 평서대원수라 자칭한 홍경래,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한 뒤 서울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다고 한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를 구했는데, 가산 땅에서 서자 출신의 뛰어난 우군칙과 의기투합했다. 이어 대부호인 이희저를 끌어들이고 인근의 부자, 지식인, 장사들을 규합해갔다. 무기를 마련하고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를 차려 은밀히 준비하더니, 이희저가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니 굶주린 많은 유량민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초기 봉기의 주력이 되었다. 홍경래 진영의 심상찮은 움직임은 관의 주시를 불러왔고, 홍경래는 이듬해 1월에 거사하려던 것을 앞당긴다. 순조 11년 12월 18일, 다복동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격문은 주로 평안도에 대한 차별과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척족들의 득세를 규탄하고 있다. 대원수에 홍경래, 부원수는 김사용, 군사에 우군칙, 도총에 이희저, 선봉장은 홍총각과 이제초가 맡았다. 봉기군은 가산성으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가산 군수 정시는 홀로 말 타고 고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적을 호소했지만 마을들은 벌써 텅 비었고, 성으로 돌아와 관속, 나졸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달려나가 봉기군을 맞아들였다. 정시는 바로 목이 잘렸다. 다른 수령들은 소식을 듣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선천 부사 김익순은 얼른 항서를 지어 바치고 성문을 열어 정중히 봉기군을 맞아들인 다음 대청 위에서 술을 대접했다. 철산 부사 이장겸도 같은 행보를 보였다. 며칠 만에 싸움 한번 없이 인근 8개 고을을 접수한 봉기군, 규모는 커지고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 18일부터 1812년 5월 29일까지 홍경래, 우군칙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이다. 사진은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중 한 장면. 드라마에서는 난이 평정된 이후에도 생존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정주성이 함락 됐을 당시 최후까지 저항하다 관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기세가 오른 봉기군은 안주성을 앞에 두고 의견이 갈렸다. 신중론이 우세하면서 안주성 공격을 지체하고 말았는데 그러는 사이 관군은 응원군이 도착하고 지휘부가 새로 꾸려지면서 대오가 정비된다. 들판에서 드디어 봉기군은 관군과 만났다. 초반에는 봉기군이 제법 우세했으나 관군이 후미를 치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주한 봉기군은 본거지인 다복동을 거쳐 홍경래의 가족까지 데리고 정주성으로 돌아왔다. 수백 명을 잃은 쓰라린 패배였다. 한편 또 한 갈래의 봉기군은 북진해 의주성으로 향했었다. 곽산, 철산, 용천을 접수하며 기세 좋게 북상하던 봉기군은 패배의 소식을 들었다. 잔뜩 위축된 그들에게 관군이 공격해왔고 봉기군은 무참히 무너진다. 살아남은 일부는 정주성에 합류했다. 관서지방을 뒤흔들었던 봉기군은 그렇게 10여 일 만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 주변을 1만여 명의 관군과 의병이 포위했다. 정주성의 봉기군은 본래 더는 떨어질 곳 없는 나락까지 추락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홍경래의 기치는 위험천만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따라서 그들은 열흘간이지만 다른 세상을 보았던 터여서 뜻밖의 완강함을 보여준다. 관군은 몇 차례나 총공세를 펼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물러나야 했던 이유다. 조정은 정주성을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는 데 힘썼다. 위무책이 수차례 발표되고 새 평안 감사 정만석은 청렴함과 검약으로 백성을 넉넉하게 하면서 인심을 수습했다. 정주성의 지도부는 초조해진다.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다해서 무너질 형편, 궁여지책으로 석천이나 곽산 같은 곡식이 풍부한 성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반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기습하는 작전을 감행한다. 포위선이 넓은 만큼 한 곳에 힘을 집중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 쉽지 않았다. 몇 차례의 시도가 별 소득이 없었을 뿐 아니라, 3월 22일 새벽의 기습에서는 적지 않은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이날의 패배 뒤에도 완강함은 여전했고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는 심리전까지 보였다. 관군은 막무가내 공성전으로는 함락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보름에 걸쳐 땅굴을 팠다. 순조 12년 4월 이윽고 굴은 북문 아래에까지 이르렀고, 관군은 그 안에 1,800근의 화약을 쌓았다. 화약을 터뜨리자 굉음과 함께 공고하던 성벽이 드디어 무너졌다. 4개월에 걸친 야영과 전투로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관군이 쏟아져 들어와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봉기군, 아니, 성안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평서대원수 홍경래는 탄환에 맞아 죽고 용맹을 자랑하던 홍총각은 사로잡혔으며, 김창시, 이희저 등도 죽음을 맞았다.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홍경래의 난은 그렇게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민 출신이 일으키고 밑바닥 백성이 주력으로 참여한 민란이다. 왕이 있고, 그 아래 사대부가 있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게 당연하고, 백성은 그저 열심히 일해 나라에 바치고, 아무리 억울해도 참고 견디는 게 당연한 수백 년의 질서에 커다란 파열구를 낸 것이다. 조선 사회를 대체할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여 방향성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역사상 필연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혁명이 계속되어야 세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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