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사도세자

M스토리 입력 2025.02.17 16:13 조회수 779 0 프린트
파국에 도달한 영조와 사도세자. 사진은 영화 <사도> 중 한 장면.

효장세자가 열 살의 나이로 죽었을 때 영조는 서른다섯, 영조가 느낀 절망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몇 번씩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찾아와도 기다리는 왕자의 소식은 오지 않았다. 소식이 온 건 7년이나 지나서였다. 왕의 나이 마흔둘, 이때의 기쁨과 감격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왕은 태어난 날로 원자의 명호를 내리고, 이듬해 세자에 책봉했다. 아기 세자는 몸집도 컸고 총명했다. 왕은 대신들 앞에서 글쓰기를 하거나 팔불출 소리를 들을 만큼 자랑도 종종 했다. 세자 나이 다섯 살, 여섯 살 때 연거푸 선위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주강에 가끔 나오게 하여 글을 읽어보게 하고는 칭찬하는 장면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세자를 향한 왕의 각별한 사랑이 식기 시작했다. 뭘 해도 마냥 귀여운 어린 시절은 가고 본격적인 세자 수업이 시작된 이후다. 왕은 사실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에게 실망을 느꼈다. 나이에 비해 체격이 크고 힘도 셌던 세자는 공부보다 무예를 더 좋아하고 그나마 공부도 경정보다는 잡학,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았다. 훗날 사도세자의 부인이 집필한 한중록에는 왕이 주로 질책만 했다고 했으나, 실록에는 여전히 칭찬하는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영조는 오늘날의 임금에게 필요한 것은 무예가 아니라 노회하고 당론으로 무장한 신하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학문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세자에게 강요하였을 것이다. 공부는 좋아하지 않고 무예와 예술에만 관심이 있으니 자칫 영조 본인이 애써 쌓아온 탕평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염려가 가중되었을 것이다. 

영조 25년 왕은 선위를 발표한다. 왕이 내건 이유는 사실상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는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 대리청정도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함이다. 둘째는 세자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청정 초기에 왕은 실제로 세자의 군주 수업에 제법 정성을 쏟았다. 상서에 대한 비답, 논의와 답변 등을 지켜보며 가르침을 주었다. 지적들은 대개 노련함이 묻어나는 적절한 것이었다. 모든 선위와 대리청정이 그렇듯이 왕은 자신의 권력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선위 소동과 대리 청정은 대개 신하들을 구분하여 더욱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왕의 세자에 대한 한 번 질책은 열 번 칭찬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혹독했다. 게다가 언제 어떤 이유로 폭발할지 모르는 부왕이 아닌가. 세자는 병을 얻고 말았다. 

세자는 부왕을 대하는 것이 점점 두렵고 싫어졌다. 뜻하지 않은 질책을 부를 수 있는 대리의 일도 싫어졌다. 병이 계속되자 이런 일들을 안 해도 되었다. 병이 낫고서도 병을 핑계 대는 일이 잦아졌다. 왕은 세자에게 반성문을 쓰게도 하고 매일 일기를 써서 월말에 바치라고도 하며 단속했지만, 며칠 그러다 또 아프다고 했다.

영조 33년 11월, 왕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동궁이 지난 7월 이후 왕을 찾아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대리를 하고 있다지만,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세자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임금의 문후를 여쭈고 식사를 살피는 일이다. 그런데 몇 달째 찾아뵙지도 않은 것이다. 세자는 즉각 반성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왕은 세자를 불러 몇 마디를 묻고는 죄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엎드려 곡을 하는 게 아닌가. 왕은 다시 선위의 전교를 내렸다. 왕에게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있던 세자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세자는 왕을 대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졌다. 스스로 진현하러 가지도 않았고, 왕이 찾아온다고 하면 한숨도 못 잘 정도로 불안해했다. 서연도 열지 않았다. 이를 가지고 야단치면 잠시 반성의 뜻을 보이면 그뿐, 신하들이 중간에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왕도 세자도 달라지지 않았다. 세자가 병을 핑계로 진현하지 않은 채 시간은 계속 흘러 영조 37년, 세자에 대한 유언비어가 무성했다. 놀랍게도 세자는 칭병하며 진현의 예를 접어둔 채, 내시에게 비답을 대신 쓰게 하고 20일 동안 관서 지역을 유람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 밖에도 잡희와 사냥, 민가 출입 등의 소문이 무성했고, 그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그제서야 세자는 며칠 시연도 열고 신하들 접견도 하며 자숙하는 빛을 보인 뒤 왕을 진현했다. 1년 만의 일이다. 왕은 조용히 세자에 대한 사건들을 모두 덮어줬다. 
 
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것을 명령하는 영조. 영화 <사도> 중 한 장면.
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의 고변이 있었다. 고변을 접수한 형조 참의 이해중은 고변서를 홍봉한에게 알리고 이어 영조에게 전해진다. 경기 감사 홍계희의 건의에 따라 대궐문을 닫아 지키게 하고 친국을 시작하였다. 나경언은 새로 옷소매에서 글을 꺼내 올렸다. 홍봉한의 청으로 태워버린 그의 글은 세자의 허물 10여 가지를 낱낱이 거론한 내용이었다. 고변서에는 세자가 변란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친국 때 다시 올린 글은 단지 세자의 비행만을 열거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게는 전혀 달랐다. 또한 왕은 세자의 역모 주장을 부언이라 단정하고 있고, 나경언도 인정했다. 세자를 모해해 요행을 꿈꿨던 나경언은 신하들의 요청으로 참수되었다. 이날부터 세자는 연일 시민당 뜰에서 대죄하며 궁관을 보내 안부를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보름 넘게 대죄하고 있어도 용서의 말이 없자 세자는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 <한중록>에는 마지막의 세자의 모습으로 칼을 들고 불안해하고 거칠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세자의 병세가 더욱더 깊어지자 영조는 선원에 나가 절을 올리고 세자를 불러 휘령전으로 갔다. 이어 호위병에게 문을 5겹으로 둘러싸게 하고 궁의 담 쪽을 향해 칼을 뽑아 들게 하더니,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세손이 알고 뛰어나와 용서를 구했을 뿐 신하들은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체념한 세자가 자결하려 하자 그제야 신하들이 막아섰다. 승강이 끝에 왕은 뒤주를 내어오게 하고 그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세자빈과 세손은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지고 다음 날, 세자를 모시던 내관들, 여승, 평양의 기녀들이 참수되었다. 세자는 8일 후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두 달 뒤에 치러졌다. 그렇게 왕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지 못하게 조치한 뒤, 세손에게 동궁의 명호를 내렸다. 나경언의 고변서는 불태워졌으며, 어미가 죽일 것을 청하고, 아비가 죽이라 명하고, 장인이 앞장서서 집행한 이 사건은 진실에 완전히 접근하기란 어렵다. 

난초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정성을 다하여 매일 물을 준다면 그 난초는 어떻게 되겠는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중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의 정리를 한 번쯤 해보자.   
M스토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