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 여행기] 태국에서 헬멧을 도난당하면?

M스토리 입력 2021.12.01 17:12 조회수 3,493 0 프린트
 
오후에 치앙마이에서 출발하니 한밤중에 빠이에 도착했다. 벤이 멈춘 주차장 주변은 어둑어둑했지만,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지도도 켜지 않고 무작정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걸으니 길거리 음식과 기념품 등을 파는 빠이 시장이 나왔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먼저 숙소로 이동하기로 한다. 빠이에도 택시가 있다고 들었지만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은 없다. 시내가 작고 가게들이 붙어있어서 시내에서 머물게 될 경우, 웬만하면 걸어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시끄러운 시내에서 벗어난 숙소에서 지내려면 자전거나 오토바이 등의 이동수단은 필수다.

빠이의 첫 숙소는 시내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마음먹으면 걸어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지만 지친 몸으로 10kg의 배낭을 지고 가고 싶지는 않아서 오토바이 렌트 샵을 이용하기로 했다. 주변 가게들에 들어가 아직 연 렌트 샵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참에 운 좋게도 아직 연 렌트 샵을 발견하여 바로 들어가 보았다. 여행자들이 가장 흔하게 빌리는 오토바이는 125cc 내외의 소형 스쿠터이므로 대부분의 렌트 샵에서는 스쿠터만 있는 경우가 많다. 우연히 들어간 이곳도 그랬다. 몇 대 안되는 오토바이들 사이에서 줌머X를 발견했다. 간단히 상태를 확인하는데 이곳저곳 은근히 까지고, 꺾이고.. 성한 데가 없다. 낮에 렌트를 많이 해가서인지 애초에 빌릴 수 있는 바이크가 몇 대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데 24시간에 100밧(=약 3,500원)이라고 하니 저렴한 맛에 일단은 처음에 본 줌머X를 빌리기로 했다. 보통 여권을 맡기지만 체크인을 해야 해서 여권은 못 맡긴다고 하니 여권 대신 국제면허증과 보증금을 내도 된다고 한다. 렌트 서류를 작성하고 보증금 영수증을 받고 바로 숙소로 출발한다. 

숙소 입구에 스쿠터 몇 대가 세워져 있길래 그 옆에 세워두고, 짐만 놓고 다시 시내로 나가볼 요량으로 헬멧은 사이드미러에 걸어두고 체크인을 했다. 오늘 예약한 숙소는 4인 도미토리인데 모든 침대에 짐은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샤워하고 정신을 차리니 허기가 몰려왔다. 로비에서도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길래 시내로 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맛없는 팟타이로 끼니를 때우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전날 비가 왔는지 나뭇잎에 송골송골 얹힌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털며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오려고 바이크 주차한 곳으로 가니, 어라? 헬멧이 없다. 태국에 와서 헬멧을 바깥에 둘 때는 매번 챙겨온 와이어 자물쇠로 묶어 두거나 숙소에 보관했는데, 어젯밤은 바로 다시 바이크를 탈 예정이어서 숙소로 헬멧을 가져오지도, 자물쇠로 채워두지도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혹시 헬멧을 바이크에 걸어둔 걸 본 숙소 주인이 누군가 훔쳐 갈까 봐 보관하고 있나 싶어 여쭤봤지만, 본적도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헬멧 없이 바이크를 타고 경찰서에 가는 상황이 묘했지만 빌린 바이크도 반납 해야 하고, 걸어가기엔 너무 먼 거리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단 시내에 렌트 샵에 가서 헬멧을 빌리기로 하고 시동을 걸었다. 거리에는 무 헬멧 라이더들이 심심찮게 보였고, 헬멧 없이 스쿠터를 타고 경찰서 앞에 도착한 나를 보고 경찰관은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묻기만 할 뿐 무 헬멧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젯밤 바이크에 헬멧을 올려두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헬멧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누군가 훔쳐 간 것 같다고 얘기하니 마지막으로 헬멧을 본 시각과 헬멧이 없어진 걸 확인한 시간을 얘기해주면 CCTV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덧붙여 여기는 폴리스 스팟이고, 저 건너에 큰 건물로 가면 있는 폴리스 스테이션에서 신고하라고 알려주셨다. 

안내받은 대로 경찰서로 들어가니 영어가 가능한 경찰관분이 내 말을 듣고, 다른 경찰관들에게 통역해 주셨다. 그리고는 ‘거짓 진술을 할시 징역 3년 또는 한화 24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경고 문구가 있는 진술서를 한 장 받았다. 빠이가 여행자가 많은 동네여서인지 영어 진술서가 따로 준비되어 있어 작성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외에 헬멧 사진과 호텔 주소, 태국 핸드폰 번호등을 요청하셨다. 진술서를 작성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관광객 담당 경찰관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10분쯤 지났을까, 이전 경찰관보다 더 매끄러운 영어를 구사하는 경찰관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여쭤보셨고 나는 CCTV 기록이 있다면 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기다림의 연속. CCTV 담당자를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또 기다렸다. 태국 경찰은 분업이 정말 잘 되어 있나 보다. 워라밸이 좋을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니 여러 명의 경찰관분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시면서 나에게도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는데 갑자기 경찰차 뒷좌석 문을 열며 타라고 했다. 멋진 픽업트럭 경찰차에 타는 게 너무 신나서 어딜 가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덥석 차에 탔다. 도착한 곳은 숙소였다. 7명의 경찰관과 3대의 경찰차. 숙소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뒤 바이크를 주차한 도로 근처를 기웃거리며 CCTV가 있는지 확인했다. 처음 만나는 경찰관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혼자 여행하는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그러자 나도 헬멧 도난은 처음 있는 일인지 여쭤봤는데, 돈 같은 건 도난 당한 적 있지만, 헬멧은 처음이라고 대답해주셨다.
 
 
다시 경찰서에 와서 똑같은 진술을 또 다른 경찰관들에게 하고, 헬멧을 찾으면 숙소로 알려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밥을 먹으러 감. 총 3시간쯤 걸린 것 같다. 숙소에서 CCTV를 찾지 못했을 즘 나는 헬멧을 영원히 못 찾겠구나 생각했고 그저 빠이의 경찰서 체험을 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개인적으로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맛있는 것을 먹는 것.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진술하고 왔다 갔다 하느라 밥을 한 끼도 못 먹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지쳐 쓰러질 것처럼 배가 고파 근처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매운 볶음국수를 먹고 수박 주스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헬멧 도난 사태로 ‘바이크 여행’에서 바이크도 여행도 빠져버린 하루였지만 왠지 그리 싫지만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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