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눈을 뜨니 아파트 거실 창문이 환하다. 장마가 그쳤나보다.
출근하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 머물러있다. 운이 좋은 아침이다. 하여 즐거운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3층에서 잠시 멈춘다. 키가 크고 배가 불룩한 중년 사내가 탔다.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그러자 그도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다행이다.
언젠가 고향 선배 K가 ‘우리 아파트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고 푸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 나는
“그건 형이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했다.
그러자 K선배는“가난한 아파트라서 그래.”하며 씁쓸히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 K형의 푸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형, 그건 가난이 아닌 거 같아. 가난하지만 이웃끼리 뭐 하나라도 나눠먹으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잖아.>
오늘은 금요일이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서울 집으로 가는 날이다. 승용차를 운행해야겠기에 차를 몰고 사무실로 향하는데 아스팔트 도로가 깔끔하다. 마치 장마 비가 내 앞길을 말끔히 청소해준 것만 같다.
하늘도 푸르고 쾌청하다. 멀리 산과 산 사이로 바라보이는 건물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낯선 외국에 온 것만 같다. 차창 밖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푸른 들을 다시 바라본다.
문득‘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As above sobelow) 라는 기도문처럼 내 몸과 마음도 맑고 평온해진 느낌이 든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창문 블라인드를 걷는다. 가까운 김씨네 고구마 밭에 둘러친 초록색 고라니망이 눈에 띈다. 저지난주에 고라니가 고구마 순을 죄다 뜯어먹어 난감해하던 김씨의 누런 얼굴이 가슴에 그려진다. 그 무렵 나도 고라니가 텃밭 고추 순을 죄다 잘라먹어버려 바로 고라니망을 구해다 쳤었다. ‘고구마나 고추는 다시 싹을 낼 것’이라고 말한 김씨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였다.
김씨는 최근에 담낭암 3기 판정을 받고 방사선치료를 받느라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틈틈이 부인과 같이 옥수수와 단호박, 고추 농사를 짓느라 바쁘다. 그는 매년 들깨를 심었는데 올해는 심지 않았다. 암 치료 하느라 그랬으리라.
김씨의 쾌차를 기원하며 그 아랫집 심선생네 농장도 건너다본다.
심선생네는 일찍이 고라니망을 쳐놓아서 고구마가 잘 자라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그의 집 앞을 지나는데 심선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밭으로 들어가 찰옥수수를 여나무개나 따서 안겨준다. 하여 ‘고맙습니다.’인사하고 서울로 가져가 가족들과 맛있게 쪄먹었다. 알이 탱탱하고 찰진 찰옥수수 맛! 새삼 시골 인심이 이런 맛이구나! 싶었다.
밖으로 나와 사무실 주변에 무성한 잡초를 손으로 잡아 뽑았다. 뿌리까지 뽑았다. 그러자 땅 밑에 살고 있던 개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지난주 휴일에 아내와 아파트단지 산책길을 걷다가 무심코 보도블록 밑에 살고 있는 개미집을 발로 건드린 때처럼 개미들이 우왕좌왕 야단법석이다.
개미는 20%만이 먹이를 구하러 쏘다니거나 굴 보수작업에 동원돼 일을 한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예비 일꾼으로 편안히 쉬고 있다가 먹이를 구하러 나갔던 개미나 굴 보수 작업에 동원됐던 개미들이 돌아오면 또 20%가 교대로 작업을 하러 출동한다고 한다. 가히 지혜롭고 끈질긴 생존력이 아닐 수 없다.
사무실 주변에는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몇 송이 꺾어서 화병에 꽂으려다 그만둔다. 친구 C가 언젠가 개울가에 핀 나리꽃을 꺾어다 화병에 꽂은 것에 대해 ‘들에 그냥 두고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 게 생각이 나서였다. 대신 개망초 꽃이 등장하는 목필균 시인의 시(詩) <7월>을 인터넷 블로그로 들어가 찾아보았다.
<7월>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돌아선 반환점에/무리 져서 핀 개망초//한해의 괘도를 순환하는/레일에 깔린 절망의 날들/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장대비가 내린다 (후략)
하얗게 핀 개망초 무리와 절망의 날들, 그리고 조각난 눈물이 모여 장대비가 되어 내린다는 것이다. 순수하고 맑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시어(詩語)의 포착이 시원 명쾌하다. 시절의 눈을 뜨게 해준 목시인은 한때 뇌졸중으로 고전을 했었다. 지금은 호전되어 열심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니 다행이다.
오후 한 때, 맑았던 하늘에서 시인의 예감처럼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검은 구름 같은 우리의 고뇌를 말끔히 씻어주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