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추억의 새활용

M스토리 입력 2025.08.19 14:29 조회수 2,168 0 프린트
Photo by Anil Jose Xavier on Unsplash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고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대는 것을 보니 장마는 장마인가보다. 찬물로 샤워를 해도 잠시뿐 이내 땀이 흐르고 기분이 찝찝해진다. 하지만 창밖은 사정이 다른 것 같았다. 마치 장마를 기다렸다는 듯 초목들은 줄기를 쭉쭉 뻗고 있었고 달맞이꽃은 금빛으로, 개망초는 하얗게, 자귀나무는 연분홍 꽃을 화사하게 피우고 있었다. 텃밭 옥수수도 어느새 훌쩍 자라 금발이 섞인 붉고 긴 머리채 같은 암술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오후에는 소나기가 내렸는데도 기온이 37℃나 되었다.  

언제인가 열대야에 지쳐 무작정 바다로 떠났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 나는 남해안으로 차를 몰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자락 나무그늘 아래 주저앉아 하루 종일 넋 놓고 다도해를 바라보았다. 바다에 몸을 담그고 하루를 견디는 섬처럼…

<여름산>
여름이/얼마나 더우면/산도/남해南海에 빠져 머리만 내밀고/있을까//온종일 그을린 알몸에/파도만 끼얹고 있을까/입 다문/수평선 잡아당겨/갈매기 소리만 지르고 있을까

매년 겪는 여름이건만 전혀 숙련되지 않는다. 특히 열대야는 악덕사채 빚쟁이처럼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온몸을 불태워 장기(臟器)와 정신을 쏙 뽑아버리는 것만 같다.

그 옛날 시선(詩仙) 이태백도 그랬나보다.

<여름산에서 (夏日山中)>
백우선(白羽扇) 부채질도 귀찮아
(嬾搖白羽扇 란요백우선)
숲속에 알몸으로 들었네
(體靑林中 나체청림중)
망건은 석벽(石壁)에 걸어두고
(脫巾挂石壁 탈건괘석벽)
솔바람에 맑게 머리 식히네
(露頂灑松風 노정쇄송풍)

세상을 초월한 시선(詩仙)도 더위엔 어쩔 수가 없었나보다. 속세를 떠나 산그늘을 찾아 피서를 할 수밖에…
백우선(白羽扇)은 흰 새털로 만든 지극히 가벼운 부채다. 그런 부채로 부치는 부채질도 시원치가 않아 내던지고 숲속으로 들어가 옷을 훌훌 다 벗어버린 시인은 그래도 체면에 머리에 쓰는 망건만은 석벽에 얌전히 걸어놓고 솔바람을 쐬는 모습이, 마치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그늘 아래, 알몸으로 앉은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살아있기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여름방학을 학수고대(鶴首苦待)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어울려 강으로 산으로 돌아치며 하루 종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다가 해가 기울면 저녁노을빛 고개를 넘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풍경이 어제 일처럼 삼삼하다.

선풍기 성능이 좋지 않아 더운 바람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정오에 논 가운데 집 우물물을 길어다 매미소리 들으며 어머니와 오이냉국에 보리밥을 말아먹던 날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여 그것들을 소재로 나만의 일기를 오늘 다시 써본다. 추억의 ‘재활용’이랄까. 아니 추억의 ‘새활용’이라고 하고 싶다.

재활용이란 원자재에서 가공한 1차 생산물을 한 번 사용하고 난 뒤 재처리 과정을 거쳐 본래의 용도 혹은 다른 용도로 다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버려지는 물건에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해 새로운 가치로 창출하는 ‘새활용’이란 말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나의 출장지 아파트에 있는 책상과 걸상 그리고 전기스탠드와 선풍기, 자전거… 벽시계까지 생활용품 대부분이 재활용품이다.

그러나 비록 재활용품이지만 전기스탠드에서 비치는 빛만은 밝은 새 빛이 아니겠는가! 아침에 뜨는 태양 빛도 어제의 빛이 아니듯, 낡은 기타에서 나는 소리 역시 방금 만들어진 소리인 것처럼 버려진 것에서 새 빛과 새 소리를 꺼내서 쓰는 나의 하루도 새활용 생활이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쓰는 낱말 하나 글 한 줄도 그 옛날 선조들이 바위에 새기고 문집에 저장해놓은 글자와 문장을 슬쩍 가져다 창작이라는 명분으로 새활용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정년퇴직을 한 퇴물이지만 다시 시니어로 회사 생활을 이어가며 지난 경험들과 추억을 반추하고 다듬어 글을 쓰고 있으니, 내 생활 전체가 새활용 인생이 아닌가 싶다.

알람이 울린다. 새벽 5시다. 새활용을 위해 일어나라는 신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준비운동을 한다. 윗몸일으키기 100번 괄약근 조이기 100번…

몸과 정신을 새활용하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장간 쇠모루 같은 새활용 책상에 앉아 하얀 새 이면지를 꺼내 펼친다.

우선 김진홍목사의 말이 생각나 간단히 적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세월은 연습을 한 시간이라 생각하고 오늘부터는 그 연습한 것을 바탕으로 제대로 새롭게 살아야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올해 84세인 그는 일찍이 교회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돌산을 구입해 탈북청소년들과 함께 그 돌밭을 개간하고 있다 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장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 비를 맞으며 텃밭에서 고추와 오이가 쑥쑥 자라는 모습이 싱그럽다. 내 마음속 청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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