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가을 속 가을

M스토리 입력 2022.11.01 13:30 조회수 2,438 0 프린트
가을은 오곡백과가 익는 계절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가을에 우리의 생각도 곡식이나 과일처럼 잘 좀 익으려나? 지난봄에 M시인이 제주도에서 텃밭에 야채를 심고 태풍을 겪고 난 후 시(詩)를 써서 J일보에 발표를 했다. 야채와 생각을 잘 가꾸고 익혀 낸 그의 보람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나는 숙소 인근 야산에 텃밭을 일구었지만 4개월이 지나도록 아직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하고 있어 못내 서글프다. 

다행히 내가 텃밭을 일구었다고 하자, 지인들이 옥수수를 심어라, 수박을 심어라, 바나나를 심어라 관심과 함께 조언 아닌 조언이 자심하다. 다만 고작 2평 남짓한 밭이고 보니 그 분들의 요망을 모두 들어줄 수가 없어 아쉽긴 했으나 그래도 상추와 쑥갓, 가지와 고추, 방울토마토와 참외를 심어 곱게 순을 내었고 밭 둘레에다가는 호박을 심고 덩굴을 올렸으므로 여름 내내 호박순을 딸 수가 있어 좋았다. 하여 가족들의 푸성귀반찬을 다소나마 조달할 수 있어 즐거웠고, 내 몸의 근육과 핏줄을 푸르게 물들일 수 있어 흐뭇했다. 

가을 무렵에는 인근 마을에 사는 죽마고우 H가 찾아와 오이와 두메부추 한 이랑, 아마란스 여섯 포기를 심어주고 갔다. 장마가 지나면서 오이가 열리기 시작해 마치 광산에서 보석을 캐는 광부처럼 오이를 딸 수 있었는데, 꼭지가 말라서 떨어지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심지어 어린아이주먹처럼 열리는 게 아닌가. 전문 농사꾼이 아니다보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이웃에게 먹어보라고 권하기가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러다보니 내 생각도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모양 사납게 열매가 열리는 게 아닌가 싶어 왠지 불안했다. 물론 시(詩)라는 게 어느 날은 순하게 써져 사람들 입맛을 돋우어주는 향긋한 시가 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쭉정이 같이 써져 오히려 사람들의 감성을 해치거나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시간이 흘러 추석이 지나면서 오이가 모양이야 어떻든 노각으로 익어가고 주변에 뿌려놓았던 들깨들도 알알이 여물고 있다. 호박도 몇 통 누렇게 익어서 내 눈을 둥그렇게 뜨게 했고 H가 심어준 아마란스도 수수나 맨드라미처럼 보랏빛 꽃술을 짙게 한 아름 안겨주고 있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나의 올 농사는 완전한 성공이라고 할 수가 없겠다. 그것은 바로 2년 전에 맞아들인 백년손님인 사위가 오이 알러지가 있어 내가 수확한 오이를 단 한 조각도 먹어주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듯이 내가 밤새 정성을 들여 쓰고 내 놓은 시 역시 누군가에게는 알러지를 유발시켜 제대로 읽히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가슴을 불안하게 했다. 

오늘도 가을볕이 짱짱하다. 그 가을볕 아래서 오곡백과가 영글고 있듯이 나도 두 평짜리 텃밭 같은 속 좁은 머릿속에서 졸시 한 편 꺼내 누군가의 눈빛에 말려본다.
 
<텃밭>

오늘, 텃밭에 허수아비를 세웠다
낡은 양복을 입히고 구멍 난 모자와 썬그라스를 씌워주었다.
손가락 없는 손에 두더지 쫓는 바람개비도 들려주었다

허수아비가 나를 바라본다
내가 아닌 나인 것처럼
텃밭 가운데 서서

넘어지지 말라고
나만 지켜달라고
경고한다

세상은 텃밭이 아니라고
텃밭이 세상이라고

저녁밥도 거른 채
속절없이 
나 없는 세상 바라본다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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