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켜보면 가슴 벅찬 여정이었다. 부산을 떠나 필리핀의 습한 열기를 뚫고, 인도네시아의 끝없는 군도를 넘었다. 싱가포르의 정돈된 아스팔트와 말레이시아 페낭의 이국적인 바람, 그리고 태국 치앙마이와 베트남 하노이까지.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른 나의 라이딩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스쳐 간 수많은 현지 라이더들과 나눈 짧은 눈빛은, ‘우리는 두 바퀴 아래 하나’라는 뜨거운 우정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다.
이제 나의 바이크는 태평양을 건너 새로운 대륙의 지평선을 향한다. 미국 서부의 심장 시애틀을 시작으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캐나다 밴쿠버, 그리고 태평양의 진주 하와이 섬들을 잇는 대장정의 막이 오른다.
생명력이 요동치는 에메랄드 시티 그리고 인디언 추장의 넋

여정의 첫 관문인 워싱턴주 최대 도시, 시애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압도적인 푸른 녹음이다. ‘에메랄드 시티’라는 아름다운 별칭답게 도시는 짙은 숲과 호수,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져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하지만 대도시의 화려한 마천루 아래에는 가슴 뭉클한 역사가 흐르고 있다. ‘시애틀’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원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스쿼미시와 두와미시 부족의 대추장인 ‘시애틀’에서 유래했다. 백인 정복자들에게 땅을 내어주며 그가 남겼다는 공존의 연설은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함께 호흡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숭고한 메시지로 남아있다.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선 그의 동상과 매년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이 모여 추모식을 여는 수쿼미시의 무덤은 이 도시가 지닌 존중과 평화의 깊이를 짐작게 한다.
혁신과 거인들의 요람… 제4차 산업 혁명의 최첨단의 도시
시애틀의 매력은 고전적인 역사와 최첨단 기술이 위화감 없이 공존한다는 데 있다. 1979년 빌 게이츠가 뉴멕시코에서 고향인 시애틀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이전해 오면서 이곳은 '제2의 실리콘 밸리'로 급부상했다. 시애틀 동쪽의 한적한 부촌 메디나(Medina)에는 여전히 빌 게이츠의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어 호기심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마존, 구글, 애플 등 글로벌 IT 거인들의 연구 캠퍼스가 자리 잡아 4차 산업 혁명의 최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 항공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최대의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Boeing)의 고향이자 최대 생산 기지가 이곳에 있으며, 전 세계의 아침을 깨우는 스타벅스 1호점, 유통의 패러다임을 바꾼 코스트코 1호점과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까지 시애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최근에는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민간 우주기업 ‘블루 오리진’까지 가세해 우주를 향한 도약까지 준비 중이다. 현재 시애틀은 국경을 맞댄 캐나다 밴쿠버와 손잡고 강력한 AI·IT 밸리를 구축하며 세계 경제의 거대한 엔진으로 타오르고 있다.
바다와 기차 그리고 낭만이 흐르는 길

스포츠와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시애틀은 축복받은 도시다. 한국 야구의 자존심인 추신수 선수와 빅보이 이대호 선수가 뜨거운 땀방울을 흘렸던 메이저리그 시애틀 마리너스의 홈구장이 바로 이곳에 있다.
또한, 시애틀은 알래스카의 대자연으로 향하는 호화 크루즈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만약 바이크를 잠시 세워두고 기차에 몸을 싣는다면 시애틀 킹 스트리트 역에서 캐나다 밴쿠버의 퍼시픽 센트럴 역까지 이어지는 4시간의 해안선 기차 여행을 적극 추천한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태평양 연안의 짙푸른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가 된다.
제트시티의 거친 배기음 그리고 따뜻한 칠리 한 그릇
라이더로서 시애틀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성지가 있다. 시애틀 남부 렌턴에 위치한 ‘제트시티 할리데이비슨’ 매장이다. 워싱턴주 최대 규모인 이곳은 축구장 크기와 맞먹는 약 1,700평의 광활한 면적에 수백 대의 할리데이비슨이 도열해 있다. 50여 명의 모터사이클 전문가들이 근무하는 거대한 할리데이비슨의 성지는 라이더들의 심박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이곳에서 현지 시애틀 H.O.G. 챕터의 친구인 로넬(Ronel)을 만났다. 그는 올해 ‘시애틀 H.O.G. 칠리 챔피언십’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한 실력자다. ‘시애틀 H.O.G. 칠리 챔피언십’은 거친 라이더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자신만의 비법 칠리 요리를 선보이는 연례행사로 단순히 요리 대회를 넘어선 가족 축제다. 멤버들의 생일을 축하하고, 경품 추첨 수익금을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50-50 기부금 드로잉(수익금 절반은 경품, 절반은 기부에 사용)’를 진행하며 끈끈한 정을 나눈다. 엔진 소리가 잠시 잦아든 계절 따뜻한 칠리 한 그릇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 투박하고 다정한 문화야말로 전 세계 라이더들을 묶어주는 진정한 동력일 것이다.
끝나지 않은 길, 다시 감아쥐는 스로틀

시애틀은 차가운 최첨단 기술과 뜨거운 라이더의 열정이 완벽하게 교차하는 도시다. 추장의 넋이 서린 땅에서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혁신을 보았고, 거대한 할리 매장 한편에서 칠리 요리를 나누며 우정의 온기를 느꼈다.
나는 이제 이 푸른 에메랄드빛 도시를 가슴에 품고, 마운틴 베이커의 눈부신 설산과 밴쿠버의 숲으로 이어지는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우리가 달려갈 길은 끝없이 열려 있고, 자유를 향한 엔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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